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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냉장고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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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호 14면

영화 ‘피에타’

문제는 냉장고다.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를 보면 중반쯤 흰색 대형 냉장고가 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해독해야 영화가 제대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엽기적인 설정에 치를 떠는 사람과 찬사의 박수를 치는 사람으로 나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잔혹하고, 불편하다는 말이 많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가 상을 받은 이유라면? 우리에게는 단점인 그 모든 것이 외국 사람들에게는 장점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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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안 보이고, 그들에겐 분명한 코드들
영화 곳곳에 우리에게는 잘 안 보이고 그들에게는 분명히 보이는 어떤 코드들이 배치돼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따온 포스터뿐 아니라 김기덕은 서양미술의 전통적인 도상을 아주 명민하게 이해하고 영화 곳곳에 교묘하게 배치해 놓았다. 젊은 시절 영화를 하기 전 프랑스에서 거리 화가로 살던 그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공개한 그림 중에는 성경의 요한 계시록을 그린 그림이 있다. 죄와 구원이라는 서양 문화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김기덕 특유의 재해석이 돋보인다.

다시 말하건대 문제는 냉장고다. 누워 있는 흰색 대형 냉장고는 바로 21세기형 시체보관함이다. 누워 있는 성인 남자 크기의 하얀 직육면체. 그것은 바로 서양미술사에서 죽은 예수를 매장하는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석관(sarcophagus)이다. 1559년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에도 이런 석관이 묘사돼 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조민수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이곳에 보관한다. 석관을 21세기 차원으로, 종교적 신화를 냉장고라는 일상적인 삶의 차원으로 전치시킨 것은 김기덕의 놀라운 감각이다.

시모네 마르티니 ‘그리스도의 매장’(1340)

영화의 공간도 예사롭지 않다. 청계천의 작은 철공소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비좁고 숨막히는 공간. 녹슬어 가는 금속 공구들의 어둡고 차가운 색조. 언제부터 쌓이기 시작했을지 모르는 갖가지 물건이 뿜어내는 퀴퀴한 냄새들. 배트맨 시리즈에서 유명 감독들이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고담시(성경의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온 이름)의 어두운 뒷골목이자 타락과 죄악의 장소 그 자체다. 이곳은 더 이상 대한민국 서울의 단순한 청계천 뒷골목이 아니라 ‘죄와 구원’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풀어나가는 보편적인 장소가 된다.

현대판 석관에 아들의 시신을 둔 여자, 조민수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모두 성모 스타일이다. 그녀는 눅눅한 초록색 머플러를 느슨하게 걸쳤고, 빨간 치마를 입고 있다. 빨간 싸구려 나일론 치마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도 입지 않는 옷이다. 붉은색과 푸른색(경우에 따라서는 영화에서처럼 초록색)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하늘로 승천한 성모의 전통 복장 색이다. 붉은색은 피를 가진 인간을 의미하며 푸른색은 신을 상징한다.

영화 중간에 조민수의 옷은 흰색으로 바뀐다. 성경에서 예수는 자신이 신(神)이라는 것을 빛으로 변해 증명한다. 라파엘이 그린 ‘그리스도의 변용’(1520)에서처럼 서양미술사에서 흰색은 빛의 색이다. 30년 만에 어머니를 인지한 이강도(이정진 분)의 눈에 그녀는 사랑의 신이었다.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성모의 두건 대신 앞머리로 얼굴을 신비스럽게 가린 헤어스타일도 성모스타일의 변형이다. 그러나 구원의 여성 성모는 영화에서는 복수의 여성이 되었다. 찬양받는 여성의 덕성인 모성은 잔혹한 복수의 도구로 변질된다.

좋은 영화, 그러나 준비 안 된 관객은 불편한
김기덕이 바라보는 세상은 끔찍하다. 그의 표현대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자도, 남자도 몸을 팔아야 한다. 여자들은 성을 팔고 남자들은 이 영화에서처럼 살기 위해 사지를 절단당한다. 이런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구원은 가능할까? 김기덕은 특유의 날것의 감각으로 죄와 구원이라는 오래된 문제, 유럽 문화의 전통에 깊숙이 칼끝을 들이민다.

주인공을 향해 쏟아지는 “불에 타 죽을 것이다”라는 저주를 들으면서 혹자는 노동자들의 분신투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서양 사람들은 묵시록의 예언을 떠올릴 것이다. 구약에 묘사된 신은 곧잘 분노하고 인간을 벌한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는 신의 새로운 이름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죄에 빠진 세상에서 사랑은 자기희생과 처절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 실천된다. 기독교를 문화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극의 진행 과정은 낯설지 않은 것이다.

참혹한 죄악의 세상. 복수는 있었으나 부활(구원)은 없었다. 복수를 시도한 조민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강도에 대해 육체적으로 복수하지 않았다. 고통의 진정한 근원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이다. 연민과 공감의 능력이 없던 잔혹한 이강도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고통의 진원지를 심어놓음으로써 그녀의 복수는 시작된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잃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생겼다. 생모가 아니라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여자라는 것을 결국 알게 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은 그에게 컸다. 조민수의 죽음으로 복수는 완성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함으로써 삶은 지옥으로 바뀌고 구원은 요원해진다.

조민수가 자신의 친아들을 위해 뜬 스웨터를 입고 이강도는 죽음을 택한다. 그 스웨터에도 색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앞서 말했듯 흰색은 신의 색이고 분홍색은 인간의 살색이다. 그 옷을 입고 강도는 시신을 묻은 곳에 심은 나무에 물을 준다. 서양 중세미술에 등장하는 ‘생명의 나무’라는 테마의 현대적 번역이다. 이는 죄와 구원, 인간과 신이라는 테마를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이강도의 마지막 선택은 악의 화신 자체였던 자신의 자발적 소멸이다. 차가운 새벽 그는 붉은 피를 길게 길게 흘리면서 길에서 죽어간다. 김기덕 특유의 잔혹함의 미학이 인상 깊게 각인되는 대목이다. 미술을 포함한 서구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잔혹한 아름다움에 전율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게 황금사자상이 그의 손에 쥐어진 이유고, 이런 맥락을 모르고 영화를 보면 그저 불편함과 잔혹함만 남는 이유다. 재능 있는 감독의 좋은 영화, 준비 안 된 관객의 불편한 영화. 이것이 영화 ‘피에타’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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