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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감각 없는 지배층 아래 고단한 삶 말하고 싶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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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호 10면

기자는 사실을 기록하는 이다. 그래서 책을 내도 대개 실화(實話)와 자료를 바탕으로 삼는다. 하지만 54년간 기자로 활약해 온 중앙일보 김영희(76·사진) 국제전문 대기자는 팩션(fact+fiction) 소설을 펴냈다. 바로 소설 하멜(중앙북스)이다. 저자는 굳이 소설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숙명적으로 팩트(fact)에 갇힌 글을 써 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사건을 접할 때마다 ‘만약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고 판타지를 갖게 되더라. 사실에 허구를 더하는 역사소설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소설 하멜』로 팩션에 도전,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소설 하멜은 1653년(효종 3년) 조선 땅에 표류한 하멜(?∼1692)과 네덜란드 선원들이 13년 뒤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체류기를 뼈대로 삼는다. 당시 국왕이던 효종·현종과 조정, 사대부는 청나라를 쳐 명나라를 일으키고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하겠다는 기치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박건조술, 총포제작술 등 각기 신기술을 갖춘 이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군 장비 개선에 활용코자 했지만 정작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되레 그들은 임금을 호위하는 장식품으로 동원됐고, 사대부 집으로 불려가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나중엔 청나라에 그들의 존재가 알려질까 멀리 유배를 보냈다. 하멜 일행은 조선 여인들과 가정을 이뤄 살았지만 극빈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666년 선원 중 8명이 몰래 나가사키로 탈출해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저자는 이 사건을 ‘국가적인 기회 상실의 전형’으로 파악했다. ‘왜 조선의 지배층은 네덜란드 선원들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런 가정이 이 소설의 출발점인 것이다.

『소설 하멜』의 표지

저자가 ‘하멜’을 소재로 다룬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5년 ‘문학사상’ 10월호에 하멜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은행나무의 전설’을 발표했다. 이후 8년간 새로 쓰다시피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그는 “현업을 함께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멜의 고향인 암스테르담은 물론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제주·강진·남원·순천·여수 등을 수차례 둘러보는 긴 여정을 거쳤다”고 했다.

-역사소설이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궁금하다.
“하멜 일행이 표류된 뒤 한양·강진, 그리고 여수·순천·남원으로 분산돼 13년간 노예생활을 했다는 것이 역사적 팩트의 큰 줄기다. 조선 조정에서 이들의 처리를 놓고 회의한 것도 사실이다. 기록에는 심지어 선원들을 처형해 버리자는 얘기까지 나오더라. 대신 등장인물들에는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 가령 하멜을 돕는 여성 무역상 장가선과 하멜의 아내가 되는 돌선은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반면에 조선을 끝없이 압박하는 청나라 장수 타타는 용골대가 모델이고, 제주목사 이원진은 실명 그대로다.”

-많은 역사적 사건 중에 왜 ‘하멜’이었나.
“하멜이 떠나온 1650년대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하멜이 소속된) 동인도회사 역시 사실상 네덜란드의 해군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들이 조선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하멜에 관한 얘기는 그들이 조선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어떻게 느끼고 반응했느냐에 집중돼 왔다. 하지만 거꾸로 명·청밖에 대외 관계가 없었던 조선이 서양을 어떻게 대했느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멜 일행이 가진 기술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나 다름없었는데 당시 지배층은 보석을 보는 눈이 전혀 없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국제감각이 부족한 지배층 밑에서 백성들이 얼마나 고단한가, 그런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었다.”
저자는 이를 일본과 조선의 근대사가 엇갈린 갈림길로 부각시켰다. 1666년 조선을 탈출한 하멜 일행이 도착한 곳은 일본 나카사키였다. 그곳은 조선과는 180도 딴판이었다. ‘데지마’라는 인공섬에 무역대표부가 설치됐고, 네덜란드 무역선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일본은 당시 서양과 단순히 장사만 하는 게 아니라 발 빠르게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제정세를 파악해 대외정책에 반영했다. 저자는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돼야 했던 운명의 갈림길이 이때 생긴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책을 쓰며 어떤 가정들이 떠올랐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는 독일 선교사로부터 서양문물을 익혔다. ‘그가 독살당하지 않고 왕위를 계승했더라면’이라는 역사의 가정은 나 말고 한국인이라면 모두 품게 될 것이다. 광해군도 국제정세를 현실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었다.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노론 세력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심정이 생긴다. 이런 마음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런 가정은 현재의 대한민국에선 안 생기나.
“당시엔 외국 사정에 어두워 국정을 그르쳤지만 이젠 정보사회니까 그럴 리는 없다. 다만 현재 지도자들은 국가 전략, 비전, 공공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현대사에서도 ‘이프(if)’는 여전히 성립된다.”

-난세를 그렸지만 그래도 이상적 인물이 있을 텐데.
“가상의 인물 장가선이 그렇다. 그는 임금과 중국 사신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하멜에게도 연정을 품게 했다. 게다가 상재가 뛰어났고 넓은 세상을 볼 줄 알았다. 예를 들어 작품엔 반계 유형원(1622~1673)이 등장한다. 반계는 다른 조정 관료들과 달랐다. 모두 청나라를 치겠다는 북벌론을 외칠 때 서벌론을 주장했다. 육군이 아닌 해군으로 청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안에서 배를 만들며 설욕을 꿈꿨다. 하지만 장가선은 북벌도, 서벌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겉으론 유형원을 지원했지만 내심 그 배가 무역선으로 활용될 것을 알고 한 일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쓸 때 상상력을 가장 마음껏 펼쳤고 또 후련했다.”

-책을 쓰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
“아무리 픽션이라도 역사의 물줄기는 따라야 했다. 그런데 일단 하멜 부분에 대해서 우리나라 기록이 많지 않았다. 하멜 표류기가 거의 다라고 보면 된다. 조선왕조실록 중 효종·현종 부분에 드문드문 있는 수준이다. 게다가 지역적 배경이 유럽, 일본, 조선, 청나라까지 해당되지 않나. 그곳들의 역사적 배경 같은 것을 알 만큼 알아야 한다. 70여 권의 자료를 읽었고, 제주·강진은 물론 나카사키까지 가서 향토사학자들을 찾아 활용했다.”

하지만 사실 확인보다 더 어려운 숙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스토리와 문체였다. 소설이기 때문에 무조건 재미있어야 하고, 문장 스타일 역시 젊은 독자가 읽어도 ‘구닥다리 같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8년간 수없이 스토리를 발전시키고 문장을 다듬었다. 그래서일까. 하멜이 사라 얀스트, 장가선, 돌선 등의 여인들과 엮이는 러브스토리는 70대 저자가 썼다고 눈치채기 힘들 만큼 젊은 감각과 속도감을 갖추었다. “처음에는 문장 자체가 굉장히 거칠었다. 섹스신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한데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다 보니 꼭 질퍽거릴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런 부분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 같아 본보기로 삼았다. 그러면서 원고를 정말 수도 없이 고쳤다.”

책을 내고 한 숨 돌릴 법도 한데 저자는 벌써 다음 소설을 구상해 놓았다. 시대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 무대는 광대한 시베리아라고 했다. “시베리아의 광대한 풍경, 야생의 생명체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지…. 엄청난 도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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