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잡스처럼 … CEO는 구체적 비전을 말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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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스티브 잡스 1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 2일, 정보기술(IT) 전문 블로그 ‘라이프 리버티 앤드 테크놀로지(Life, Liberty and Technology)’를 운영하는 마르셀 브라운이 잡스의 생전 강연을 음성 파일로 공개했다. 1983년 6월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열린 국제디자인콘퍼런스(IDCA)에 참석한 잡스의 강연이었다.

 음성 파일 속 잡스는 28세에 불과했지만 업계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86년이면 미국에서 한 해 판매된 PC 숫자가 자동차를 능가하게 될 것”이라든가 “몇 년 안에 자동차보다 PC를 더 많이 쓰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실제로 맞아떨어졌다. “PC가 새로운 정보 전달 수단이 될 것이며 통신이 가능한 휴대용 컴퓨터가 생기면 어디서나 e-메일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견 역시 그대로 현실이 됐다.

 하지만 기자의 귀를 사로잡은 대목은 따로 있다. “정말 뛰어난 컴퓨터를 책 크기로 만들어 들고 다닐 수 있게 하겠다. 20분 안에 사용법을 배울 수 있게 하고 통신선 같은 것으로 연결하지 않고도 대형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당시는 아이폰이 나오기 24년 전이었다. 그때 잡스는 이미 자신이 어떤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지를 제시한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오프라인 상점에서 사는 건 적합하지 않다. 전화망을 통해 결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말 그대로 애플은 각종 소프트웨어를 앱스토어를 통해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있다.

 잡스처럼 뚜렷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나아가 만들려는 상품에 대해서까지 구체적인 얘기를 하는 최고경영자(CEO)를 국내에선 찾기 힘들다. “1등이 되겠다”거나 “경쟁사를 따라잡겠다”고 말할 뿐이다. 한국 기업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퍼스트 무버’는 잡스의 애플처럼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기업이 아닐까. 삼성과의 특허 소송으로 미운 털이 박힌 애플이지만,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세상을 떠난 잡스가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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