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고개 숙이고 들어오라' 日 통화스와프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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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700억 달러 규모의 한·일 통화스와프 연장 카드를 들고 한국을 집요하게 압박하고 있다. 지난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보복 조치의 일환이다. 일본은 지난 2일 통화스와프를 연장해 줄 순 있지만, 한국이 먼저 요청하는 수순을 밟으라고 밝혔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메시지다. 한국으로선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다.

일본의 신임 재무상 조지마 고리키(65)가 2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에 대한 질문을 받고 “시한 연장 여부를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도쿄 로이터=뉴시스]

 일본 NHK방송은 3일 재무성 담당자가 전날 열린 자민당 회의에 참석해 한 통화스와프 관련 발언을 전했다. “애초 한·일 통화스와프는 한국의 요청이 있었기에 검토했던 사안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한국으로부터 (연장 여부에 대한) 타진이 없다”는 내용이다. 이는 한국이 요청해 오면 협정을 연장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연장도 없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NHK는 보도했다. 한국의 기를 꺾겠다는 교묘한 제안이다.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에 통화스와프는 비상시에 요긴하게 쓸 ‘외환 마이너스통장’이다. 한·일 양국은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가 심해지자 기존 130억 달러 규모였던 통화스와프를 700억 달러로 확대했다. 일단 1년 기한으로 추후 연장하기로 했다. 당시 우호적이었던 양국 관계 덕분에 나온 조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도 양국은 통화스와프를 300억 달러로 일시 증액했었다.

 그러나 최근 독도 갈등 이후 일본이 감정적으로 나오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애당초 일본은 통화스와프를 중단하겠다는 의사까지 표명했다. 1일 개각에서 경질된 아즈미 준(安住純) 재무상은 지난 8월 통화스와프 확대 조치의 중단을 처음 거론했다. 그의 후임자인 조지마 고리키(城島光力·65)는 2일 “통화스와프 협정 시한 연장 여부를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중단을 운운하던 데 비해선 다소 유연해진 태도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이 먼저 요청하라”는 얘기를 언론에 흘린 것은 결국 달라진 게 없음을 보여준 셈이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직후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지금까지 강경한 자세로 일관했다. 그가 총선을 앞두고 개각까지 단행할 만큼 보수 우익의 압력을 의식해서다.

 통화스와프는 그 취지를 감안하면 이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통화스와프의 기본 정신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재발 방지와 역내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중·일’ 재무장관이 2000년 5월 태국에서 만나 출범시킨 치앙마이이니셔티브(CMI)였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개별 국가 차원으로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한계가 따르는 만큼 역내 국가들이 공동 대응하자는 결의였다.

 이에 따라 한·일은 2001년 7월 통화스와프를 시작했고 꾸준히 그 규모를 늘려왔다. 통화스와프는 일본의 입장에서도 필요했다. 엔화 절상 압력을 완화할 수 있고, 엔화의 국제 위상을 높이는 카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충분한 외환보유액(3169억 달러)을 쌓고 있는 데다 미국의 3차 양적완화 등으로 외화가 밀려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치와 경제는 분리하자는 게 우리 입장이다. 일본의 공식 입장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말을 아꼈다. 오정근 고려대(경제학) 교수는 “통화스와프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한·중·일 정상회의 사무국이나 주요 20개국(G20)을 통한 우회적 금융외교로 문제를 푸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통화스와프=국가 간에 서로 외환을 맞바꿔 빌려주기로 하는 협정.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외화가 갑자기 부족해지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주변 국가들도 피해를 보기 때문에 빌려주는 주변 국가로서도 필요한 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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