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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가장 행복했던 사나이' 루 게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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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서 야구사를 다시 쓴다면 아마도 메이저리그 역사의 절반은 바뀌어지지 않았을까?

최고의 홈런타자라 평가받는 베이브 루스가 타자 아닌 투수로서 활약했다 하더라도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을 것이며(루스는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이었던 1916년과 1917년에 23승과 24승을 기록했다), 조 잭슨이 1919년의 블랙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그 역시 호너스 와그너나 트리스 스피커처럼 3천안타를 달성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테드 윌리엄스가 좀 더 겸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최다 MVP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다(윌리엄스는 1942년과 1947년 두 번에 걸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도 두 시즌 모두 MVP를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도 이 만약이라는 단어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선수는 양키스의 철마 루 게릭이었을 것이다.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의 한 명이었던 게릭은 1939년 '루 게릭병'이라는 희귀한 질병으로 은퇴하기까지 1995타점과 493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만약 게릭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행크 에런과 베이브 루스만이 가지고 있는 2천타점이라는 영광스런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았을 것이며, 시카고 컵스의 돈 베일러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선택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500홈런이라는 기록 역시 이루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게릭은 이러한 안타까운 야구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팬들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이 원했던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독일로부터 이주한 이민 2세였던 게릭은 4명의 아이 중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릭의 부모는 그를 정성들여 키웠고, 게릭 역시 결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후일의 역사가들이 게릭을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의 한 명으로 지목하는 데는 결코 주저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 야구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야구를 깨우치게 된 게릭이었지만 그는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뛰어난 야구실력을 화려하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조용하면서도 성실한 선수였기에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게릭으로부터 팬들은 그의 타고난 성실함을 먼저 느끼지만 그는 또한 메이저리그에 기여했던 업적으로서도 훌륭한 선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릭은 1926년부터 1937년까지 12년 연속으로 3할을 기록했을 정도로 타격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선수였다.

게릭이 남겨 놓은 위대한 기록 중의 하나는 바로 1926년부터 1938년까지 기록된 13년 연속 100타점이라는 대기록이다. 13년 연속 100타점은 게릭이 이 기록을 세운 후 3년이 지난 뒤에 지미 폭스에 의해서도 작성되었지만 현재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 기록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기록된 한 시즌 평균 147타점이라는 기록은 1977년 신시내티 레즈의 조지 포스터가 해내기까지 어느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기록이다.

한 시즌에 100개 이상의 장타를 기록했던 선수는 그를 포함해서 역사상 7명의 선수만이 가지고 있는 대기록이며, 1932년 6월 3일 한 경기에서 4개의 홈런을 뽑아냈던 게릭은 이 기록을 달성한 최초의 아메리칸리그 선수가 되기도 했다. 생애 통산 73개의 3점홈런과 166개의 2점홈런을 기록했던 게릭은 이 때문에 300개 이상의 홈런을 쳐냈던 선수 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홈런 대비 타점수가 가장 높은 선수로 남아 있다.

게릭은 5시즌에 걸쳐 400루타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기록이다. 불과 13명의 선수만이 이 기록을 달성했는데, 척 클레인이 3번을 기록했고 베이브 루스가 2번을 기록했을 뿐이다.

게릭은 그의 훌륭한 동료였던 베이브 루스와 비교될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유일한 선수였다. 양키스 라인업의 앞뒤에서 무서운 타력을 보여주었던 루스와 게릭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듀오로 평가받고 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3년 연속 200안타를 기록했던 게릭은 양키스 선수로서는 이 기록을 달성한 최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게릭의 통산 23개의 만루홈런은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를 제외하고서는 어느 누구도 20개 이상의 만루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 비록 병으로 인해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이어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게릭이었지만, 그의 이 기록이 칼 립켄 주니어에 의해 깨어지기까지는 무려 5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생애 통산 6번이나 양키스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게릭은 1936년 뉴욕 자이언츠와 맞붙은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는 팀동료였던 조 디마지오와 함께 6타점을 기록했는데, 18-4의 대승을 거두었던 이 경기에서 기록된 6타점은 1995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에드가 마르티네스가 디비전시리즈에서 양키스를 상대로 7타점을 기록하기까지 무려 59년간이나 지속된 포스트시즌에서 기록된 한 경기 최다타점이었다.

그러나 게릭에게 있어서도 한 가지 불행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던 시대의 다른 두 명의 대스타의 존재로 인해 그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게릭의 선수생활 초창기에는 베이브 루스라는 영웅의 존재 때문에, 그리고 선수생활 후반기에는 조 디마지오가 있었기에 게릭의 모습은 팬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지 못했다.

하지만 게릭은 이런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았고 팬들로부터 이들의 관심을 빼앗을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모습은 1939년 7월 4일, 6만2천명의 팬들 앞에서 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팬 여러분, 저는 17년 동안이나 야구장에 있었으며, 팬 여러분들로부터 친절과 감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입니다."

선수생활이 끝난 뒤 사회의 불행한 경험을 가지게 된 청소년을 위해, 그리고 동료야구 선수들을 위해 헌신적인 생활을 했던 게릭은 박애적인 면을 가진 인간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1941년 6월 2일, 게릭은 디마지오가 연속경기 안타 행진을 이어가는 것을 단지 19경기 밖에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릭의 야구인생은 어찌 보면 완벽함의 전형인 것이다. 최고의 위치에서 선수생활을 끝마치고 죽음을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은 충분히 이것을 느끼게 한다. 야구 역사에서 그가 남긴 발자취는 영원한 전설로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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