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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억압받는 자들 편에 선 ‘보수주의 아버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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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호 25면

정파의 구별이 흔들리는 시대다. 보수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버크를 다시 읽는 게 절실하다.

‘기독교적 불교’ ‘불교적 기독교’를 표방하고 모색하는 일군의 신학자, 학자가 있다. 기독교면 기독교, 불교면 불교지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종교도 그렇지만 정치 사상, 정치 철학도 사실은 복합적이다. 퍼즐 조각처럼 재구성하는 게 가능하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2> 에드먼드 버크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사상가·연설가·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97)는 ‘보수주의의 아버지’다. 더 정확하게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liberal conservatism)의 아버지’다. 국내 보수 정치 이론뿐만 아니라 보수적 국제정치이론까지 정립했다. 버크는 제자나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지만 19세기에서 지금까지 모든 보수주의 이론가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19세기 영국이 낳은 최고의 인물
버크는 ‘보수주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의 아버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자유주의 사학자 액턴 경(Lord Acton· 1834~1902)은 버크를 영국의 3대 자유주의자로 손꼽았다. 역사가·정치가 토머스 매콜리(1800~59),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98)과 함께다. 영국 총리를 네 차례 지낸 글래드스턴은 버크를 일컬어 ‘지혜의 창고(magazine of wisdom)’라고 했다.

19세기에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진영 모두 버크를 추앙했다. 그래서 버크는 ‘19세기 잉글랜드·아일랜드가 낳은 최고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지극히 단순하게 보면 버크는 1790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 줄여서는 프랑스 혁명론의 출간을 기점으로 자유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전향’한다. 자유주의자였을 때 버크는 민주화 과정을 겪고 있는 당시 영국에서 개혁을 표방했다. 역사를 거슬러 왕권을 다시 강화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버크는 항상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편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의 편이었으며 영국제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미국 편이었다. 시대를 앞서 노예제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버크는 또한 배운 사람, 돈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사람은 경험, 그리고 경험을 통해 얻은 생각의 산물이다. 버크가 약자들의 편에 선 배경에는 버크의 출신지와 종교가 있다. 버크는 잉글랜드에 예속된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잉글랜드 출신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문은 가톨릭 전통이 강했다. 어머니, 여동생, 아내, 장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도 가톨릭이었으나 사무변호사가 되기 위해 성공회로 개종했을 가능성이 크다.

버크는 가톨릭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 가톨릭도 성공회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항상 가톨릭에 유리한 주장을 폈다. 풍자 만화에서 버크는 예수회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버크는 평생 몰래 가톨릭을 믿고 있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버크는 종교적 관용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관용은 종교의 일부다. 그래서 나는 종교와 관용 둘 중 무엇을 희생시켜야 되는지 모른다. 나는 관용과 종교 모두를 갖겠다. 둘 중 하나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버크는 미국 혁명에 찬성했다. 그런 그가 프랑스 혁명에는 반대했다. 일각에서는 프랑스 혁명으로 가톨릭 교회가 탄압 받았기 때문에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적대시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정설에 따르면 버크는 이론적·철학적 이유로 프랑스 혁명에 반대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배경이 되는 이론과 철학, 특히 루소의 사상을 불신했다. 버크는 이론에 반대했다. 많은 경우에 이론은 검증되지 않은 추상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에서 파생되는 권리나 원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언제나 옳고 절대적인 규칙·원칙은 없다는 게 버크의 관점이었다.

이념·이론 혐오했으나 보수주의 사상 정립
이론은 싫어했지만 버크는 철학과 역사에 대한 성찰을 현실 속 구체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활용했다. 특히 역사는 버크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무작정 ‘미래는 항상 좋다’는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버크는 과거를 이상화시켜 ‘과거는 항상 좋았다’라든가 ‘과거의 황금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버크는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할 때는 전후좌우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가지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해서 맹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복잡한 인간의 본성, 사회의 여건을 무시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버크는 이론보다는 전통, 관습, 관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귀족도 필요하고 교회도 필요하다고 봤다. 버크는 비관론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의 고통과 불평등은 없앨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버크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영국인들은 프랑스가 명예혁명(1688~89)을 거친 바 있는 영국처럼 된다고 생각했다. 상당수가 프랑스 혁명에 환호했다. 프랑스가 혁명에 몰두하느라 국제관계는 등한하게 돼 영국에 유리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버크는 정반대로 봤다. 그는 프랑스가 공포와 군사독재의 길로 간다고 내다봤다.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의 등장을 일찌감치 내다본 것이다. 또한 혁명을 거친 프랑스는 영국에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국에 대해서도 버크의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버크는 영국이 혹독한 세금과 관세 등으로 식민지 미국을 억압하는 정책이 계속되면 불만이 폭발해 미국이 독립을 시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버크는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프랑스도 단 몇 주간 방문했다. 버크는 문헌만으로도 정세를 판단할 수 있는 천재였다.
보수주의자였지만 버크는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는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스스로를 보존할 수단도 없는 국가다”라고 주장했다. 버크의 ‘변화 방법론’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었다. 그는 “조상에 대해 절대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후세에 대한 선경지명도 없다”고 역설했다. 버크에게 변화의 출발점은 검증되지 않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검증된 전통이었다. 또한 변화는 전통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버크가 바라는 변화는 피를 흘리지 않는 변화였다.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인 버크는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한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봤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억압적·폭력적 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라고 본 것이다. 아일랜드의 경우에서도 영국과 싸우지 않고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19세기와 다르게 20세기는 버크의 보수적 측면만을 부각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버크를 기반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에 반대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독점해온 버크를 진보주의자들이 되찾아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버크는 성공회의 아성인 트리니티칼리지(Trinity College)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버크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작가로 살기는 힘들었다. 지주 출신이거나 성직자·교수 아니면 생계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다.

버크는 30년 이상 하원의원 생활을 했으나 주요 관직을 맡은 적은 없다. 자신의 지역구인 브리스틀 주민들에게 자신은 브리스틀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 정당론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남긴 말이다.

버크의 글은 따분하지 않다. 피를 끓게 하는 무엇이 있다고 평가된다. 유머도 있다. 그의 유머는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스위프트가 사망한 1745년 버크는 대학생이었다.

1794년 은퇴한 버크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자신의 묘비에 이름을 새기지 말 것을 주문했다. 영국을 침공한 프랑스인들이 무덤을 파헤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765년 버크가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정밀한 정치철학을 후세에 남겼을지도 모른다. 버크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1757)는 드니 디드로와 이마누엘 칸트가 주목한 저작이다. 이 책에서 버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마음에서 최우선이자 가장 단순한 감정은 호기심이다.” 버크는 사람을 움직이는 요인으로 호기심과 더불어 즐거움과 고통을 지목했다.

버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필요한 시대다. 20~21세기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버크는 정부를 부정적인 필요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새로운 보수주의나 새로운 자유주의·진보주의를 창출하는 작업은 버크를 반드시 거쳐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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