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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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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신용호 정치부문 차장

박근혜가 사과했다. 아버지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5·16과 유신에 대해선 ‘헌법 가치 훼손’이란 평가도 했다. 박정희의 정통성까지 건드렸다. 그를 잘 아는 이들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말이라고 한다. 안철수도, 문재인도 ‘그 정도면 잘했다’고 했다.

 사과에 담긴 정치적 함의는 무한대다. 어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과 극이 된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이 사과를 많이 해 좋을 건 없다. 하지만 사과에 인색하거나 어설픈 건 더 나쁘다. 그의 사과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평가한 게 있다. DJ 자서전에 나온다.

 “세월이 흘러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그녀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였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박 대표의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 사과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당시 DJ는 가슴이 찡했는지 박근혜에게 “동서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못한 일을 하라 해서 미안하지만 박 대표가 제일 적임자”라고 했다.

 박근혜는 2004년 당 대표가 된 후 최근까지 열 차례가 훨씬 넘게 아버지의 일에 대해 사과했다. DJ를 만나 사과도 했지만 대체로 공과(功過)를 함께 언급하며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도 그의 생각으론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겠다. 그래서인지 사과할 때 ‘이미 사과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란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하지만 그의 사과를 일일이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그에겐 여러 번이지만 사람들은 처음이거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이미’나 ‘여러 차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진정성을 의심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게다가 5·16이나 유신의 과(過)에 대한 평가는 에두르면서 그러니 말이다.

 24일 작심한 박근혜의 사과는 어땠는가. 절반의 성공은 돼 보인다. 지지율을 짓눌렀던 과거사 논란이 잦아들 것 같다. 과거사에 대한 평가가 확 바뀐 건 고무적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중요한 사과에서 시기적으로 쫓긴 감이 없지 않다. 또 마음속에 진정성이 있었다면 그 부피만큼 더 표현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도 싶다.

 박근혜의 사과는 지금부터가 중요해 보인다. 확 달라졌다 해서, 더 이상 나아갈 말이 없다 해서 이번 사과로 종지부를 찍으려는 생각은 없는지 싶어서다. 열 차례가 훨씬 넘게 했다지만 그의 사과는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아직 그의 사과에 대해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가 적지 않다. 반(反)박근혜 진영과 부동층이 그들이다. 어차피 대통령이 되려면 그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사과는 리더의 언어라고 하지 않나. 특히 박근혜는 과거사에 관한 한 사과를 아낄 이유가 없다. 나아가 말에 그치지 말고 실천으로 진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