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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시차 뛰어넘어 최선 다하는 그들을 누가 감히 노인이라 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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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지난주 한국과 7시간 시차가 나는 유럽 지역으로 벼락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확실히 몸이 전 같지 않다. 한창 젊었을 때는 며칠만 지나면 시차고 뭐고 금방 적응이 됐었지만 지금은 그렇질 못하다. 지난번 여행 때 워낙 고생을 했던 터라 이번엔 대책을 세웠다. 출발 전 공항에서 ‘약’을 샀다. 시차 적응에는 보통 멜라토닌 성분이 함유된 호르몬제가 좋은 걸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구입한 건 수면유도제였다. 잠잘 시간에 잠을 못 이룸으로써 생기는 수면부족이 내 경우 시차증, 이른바 ‘제트 래그(jet lag)’의 결정적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인지 이번에는 고생을 좀 덜했다.

 일행으로 같이 간 전직 고위 외교관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시차를 극복하는 나름의 비법을 갖고 있다고 한다.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시계를 목적지 현지 시각에 맞춰놓고, 모든 행동을 현지 시간대와 일치하도록 조정한다는 것이다. 현지 시각으로 잠을 잘 시간이면 세상 없어도 잠을 자고, 식사도 현지 시각에 맞춰 할 수 있도록 승무원에게 미리 부탁을 해놓는다는 것이다. 수시로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그로서는 일종의 자구책 아닐까 싶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지난주 열린 제1회 ‘한국-EU 포럼’에 참가한 한국대표단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많았다. 70대 원로 학자들도 있었다. 그분들 앞에서 시차증에 대해 떠든다는 자체가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노릇이지만 그보다 나를 부끄럽게 한 것은 그분들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시차증으로 치면 나보다 훨씬 심할 텐데도 그분들은 시종일관 기민하고 정력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한 치의 오차나 실수 없이 맡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그분들을 보면서 새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일흔의 나이에 한글을 배워 시집까지 낸 할머니 얘기가 실렸다. 틈틈이 쓴 69편의 시를 모아 『치자꽃 향기』라는 시집을 펴낸 진효임 할머니다. 동네 복지관에서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낸 시집이다. “못 배운 사람이라 긴 글을 못 써서 시를 썼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그분을 보며 새삼 그동안 나는 뭘 했나 싶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는 가사로 유명한 노래, ‘가을편지’의 주인공인 최양숙 할머니가 11월 초 KBS홀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다. 나이 일흔에 갖는 생애 첫 단독 콘서트라고 한다. 고은의 시에 김민기가 멜로디를 붙인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청아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가 궁금했는데, 바로 그분이 칠순의 나이에 무대에 선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인생의 시차를 뛰어넘어 늘 최선을 다해 사는 이런 분들을 누가 감히 할아버지·할머니, 노인이라고 하겠는가.

글=배명복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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