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명예의 전당] (25) - 지미 팍스 (4)

중앙일보

입력

결국 맥은 연봉이 높은 선수들을 내보내기로 하고, 첫번째 타깃을 연봉이 3만 3천 달러가 넘었던 시먼스로 잡았다. 시즌이 끝난 직후인 9월 28일, 시먼스는 하스, 다익스와 함께 10만 달러에 화이트 삭스로 팔려 갔다. 이후 애슬레틱스의 추락은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1933년, 팍스는 또다시 야구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겼다. 그는 .356의 타율과 48홈런, 163타점을 기록하여 전년도에 아쉽게 놓쳤던 트리플 크라운을 드디어 차지하였다. 애슬레틱스는 전력의 손실을 팍스와 카크린, 그로브 등의 분전으로 메우며 워싱턴 세너터스와 양키스에 이어 리그 3위에 올랐다.

클레이 대븐포트가 후대에 타자에 대한 종합적 평가 수단으로 개발한 EQA 공식에 따르면, 팍스는 이 해에 드디어 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최고의 타자'라는 위치에 올랐다. 루스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던 1925년을 제외하면, 그가 타자로 완전히 자리를 굳힌 뒤 EQA 수위를 빼앗긴 첫 해는 바로 이 1933년이다.

팍스는 이 해에도 MVP가 됨으로써, 2년 연속으로 이 자리를 차지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후 이 위업을 재현한 인물은 10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자, 팀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맥은 이 해 12월에 밥 클라인과 래빗 와슬러라는 두 무명 선수와 12만 5천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그로브와 비샵, 투수 루브 월버그를 묶어 레드 삭스로 보냈다. 또한 당대 최고의 포수 카크린도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팍스을 제외한 애슬레틱스의 대스타들은 모두 떠난 것이다.

맥은 팍스만큼은 당장 내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팍스가 재정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빛나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맥은 그의 연봉을 1만 6천 333달러에서 1만 2천 달러로 삭감하려 하였다. 결국 팍스는 난항을 겪은 끝에 1만 6천 달러에 도장을 찍었다.

애슬레틱스가 더 이상 강팀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명확해졌다. 팍스는 1934시즌에 루 게릭에 이어 홈런 부문 2위에 올랐고 130타점을 올렸으나, 그의 분전도 팀의 추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해에 애슬레틱스가 받아쥔 성적표는 리그 내 8팀 중 5위였다. 애슬레틱스가 3위 밖으로 밀려난 것은 1924년 이후 처음이었다.

1935시즌을 앞두고 맥은, 신인 앨릭스 훅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팍스를 과거의 포지션인 포수로 복귀시키기로 결심하였다. 팍스는 이 결정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결국 마스크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훅스는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5월 말에 다시 마이너 리그로 보내졌고, 팍스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다.

이 해에 팍스는 36홈런을 쳐 다시 리그 홈런왕이 되었고, 장타율에서도 리그 수위에 올랐다. 그러나 팀의 전체적 전력은 전년도보다도 떨어진 상태였다. 핑키 히긴스와 밥 존슨이 그나마 팍스와 함께 팀 타선을 지탱해 주었으나, 결국 애슬레틱스는 꼴찌로 추락했다.

맥은 이제 팍스을 데리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그는 레드 삭스에 팍스와 히긴스, 유격수 에릭 매크네어 등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결국 레드 삭스는 팍스와 애슬레틱스의 에이스 자니 마컴을 받고 그 댓가로 15만 달러와 고든 로즈, 조지 사비노를 맥에게 넘겼다.

그러나 팍스가 빨간 양말을 신고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악명 높은 보스턴 언론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빌 커닝엄이라는 지역 신문 기자가 팍스는 항상 술에 취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던 것이다.

사실 그의 폭음(暴飮) 습관은 유명했다. 더구나 맥과는 달리 주머니가 두둑했던 레드 삭스의 구단주 탐 요키는, 팍스를 영입하자마자 그의 연봉을 대폭 인상해 주었다. 팍스는 돈 관리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연봉 중 상당한 부분을 술집에서 탕진하였다.

(5편에 계속)

※ 명예의 전당 홈으로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