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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없이 복지국가 가능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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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장

사면초가다. 수출·내수·재정여건, 어느 것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다. 우리도 저성장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대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과 시장경제를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성장을 얘기하면 ‘성장제일주의자’로, 시장의 효율과 경쟁을 얘기하면 ‘시장만능주의자’로 매도된다. 정치권과 정부는 물론 심지어 경제학자 사이에서도 경제민주화, 복지 확대 등 형평과 분배만이 관심의 대상인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정부의 잘못된 판단과 개입으로 발생한다. 그럼에도 국민의 우려가 높아지면 그 책임을 시장으로 돌리고 정부의 개입을 강화하려는 행태가 반복돼 왔다.

 지난 정부는 수도권의 주택가격 상승 원인을 상위 2%의 투기적 수요 때문인 것으로 진단하고 종합부동산세 도입과 양도세 중과세를 통해 투기세력을 잡겠다고 나섰다. 또한 민간 건설회사가 분양가격을 과도하게 높게 책정한다고 보고 초과이익을 환수하려는 목적으로 규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지역 균형발전과 공공택지 조성을 위해 과도하게 지출된 토지보상비가 다시 수도권으로 유입되면서 주택가격은 오히려 폭등하고 부동산 불패신화가 이어져 갔다. 주택가격을 잡겠다는 정부 정책에도 불구하고 주택가격이 상승하자 빚을 내서라도 주택을 장만하려는 가계가 늘어났고 가계 부채는 쌓여만 갔다. 여기에 낮은 금리가 지속되면서 과도한 빚을 내 주택을 마련하는 가계도 늘어갔다. 결국 글로벌 경기침체로 성장이 둔화되자 주택가격 거품이 꺼지고 가계부채 부실이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청년실업이나 중소기업의 영세화 문제도 그렇다. 기업은 글로벌 표준을 선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배출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평준화만을 강조한 정부의 교육정책 때문이다. 또한 정부의 보호정책에 안주해 온 상당수 중소기업은 세계의 수많은 경쟁 납품업체를 제칠 능력도, 의욕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부는 대기업의 탐욕으로 중소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잘못된 진단에 이어 잘못된 처방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청년의무고용할당제’나 ‘중소기업적합업종’처럼 고용을 강제하고 경쟁을 억제하려는 정책들이 난무하고 있다.

 성장이 다시 사회적 화두가 되고, 성장동력을 복원하겠다는 것이 최우선 국정과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성장이 둔화되면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는 더욱 악화되고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실현은 더욱 멀어질 뿐이다. 미봉책을 통해 문제를 미루기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지금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때다. 경기침체기에 한계기업을 퇴출하고 과오투자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저성장시대는 오래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