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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이 넘실댄다 사랑시는 문정희의 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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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문정희 시인은 고독과 마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낯선 상황에 던져졌을 때 튀어나오는 언어와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결은 무늬고, 무늬는 자취다. 그래서 이야기이고 기억이다. 살결과 물결, 숨결을 품은 시인 문정희(65)의 새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는 몸과 물과 공기에 번져 있는 이야기로 충만하다.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출렁임으로/다만 출렁임으로 완성이어야 한다’(‘물의 시집’)는 구절처럼 그의 시에는 사랑이, 관능이 넘실댄다. 지난해 가을과 겨울 물의 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배태됐다.

 “관능시를 쓰고 싶었어요. 물은 탐미적인 출렁거림을 상징하는 문학적 레토릭(수사)이잖아요. 관능은 남녀의 교합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육체를 가진 자의 허무와 아름다움이에요. 생명의 마지막 순간은 눈부시죠.”

 사실 한국어에는 관능시가 흔하지 않다.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라는 천재가 한국시에 관능을 끌어들이며 새 장을 열었지만, 그와 견줄 만한 탐미의 경지를 내놓은 이는 드물었다.

 “50여 년 시를 쓰며 잘 익은 솜씨로 관능을 요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이라는 길가에 벌거벗은 채 남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물로 드러내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베네치아는 딱 맞는 곳이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네치아는 ‘낡아서 늙은 창녀 같고, 관광도시라 부박하지만 르네상스 예술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그래서 물결과 숨결과 살결 속에 사람들의 사연이 때처럼 배어 있다.

 “시에 나오는 베네치아는 구체적 공간이 아닌 내가 창조한 ‘나의 베네치아’에요. 모국어가 차단된 밀실, 극도로 고립된 공간이죠. 자발적 고독을 소유하자 시가 너무 쉽게 나왔어요. 너무 외로워서 그랬겠죠.”

 시가 쏟아졌던 순간을 그는 ‘갈증이 윤활유가 된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다. 그를 목마르게 했던 것은 생명에 대한 갈구이자, 사랑에 대한 열병이었다. 그의 시에는 여전히 펄펄 끓는 사랑이, 눈 먼 사랑의 노래가 가득하다.

 ‘잠시 반짝이다 결국 깨어지는 유리가/사랑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모래를 끓여 유리를 만드는 동안/천 도의 불꽃으로 타오르던 사랑이/거짓말처럼 얇은 한 조각 파편으로 남을 때’(‘유리 이야기’)라며 사랑의 정체를 꿰는 듯하다가도 ‘나는 한 번도 사랑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씨앗처럼 온몸을 던질 뿐이다/그때마다 불꽃일 뿐이다’(‘날벌레의 시’)라며 사랑의 맹목에 빠진다.

 “사랑은 거짓말 같아요. 유효 기간이 가장 짧은 생명체고, 미세한 향기죠. 자칫하면 사라져버리는. 그걸 잡으려고 하니까 심장이 뜨거워지고 갈증이 커지는 거죠.”

 사랑시는 문정희의 업(業·카르마)이다. “우리는 모두 업보의 바다에서 출렁대는 존재에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부유물 같죠. 제 눈에는 시라는 거미줄이 어떤 권력이나 으리으리한 건물보다 멋있어 보여요. 눈 먼 거죠. 시라는 의자에 묶여 있지만 얼마나 기쁜 업보인가요.”

 시인은 “언어는 한번 나가면 어딘가에 깊이 박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화살 같다”고 했다. 그의 화살은 이제 바다를 건너 더 먼 곳으로 날아가 박힐 기세다. 다음 달 프랑스에서, 내년 3월 스웨덴에서 시집이 출간된다. 진흙탕 세상과 싸워 피어낸 연꽃 같은 시들이 낯선 땅에서도 피어날 것이다.

◆문정희=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다산의 처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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