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경제학자 장하준 ‘경제민주화’ 논란에 쓴소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19일 삼성 사장단에게 강연하기 위해 삼성 서초사옥에 들어서고 있다. 장 교수는 이날 ‘한국 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한 시간 동안 강연했다. 장 교수가 삼성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합뉴스]

진보 경제학자 장하준(49)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정치권의 경제 민주화 논의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19일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에서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다. 장 교수는 ‘한국 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한 시간 동안 강연했다.

 장 교수는 “대기업의 사업 다각화와 왜곡된 소유구조에 대한 비판은 주주자본주의를 논리적 배경으로 삼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맞지 않는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사업 다각화는 대부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에서 보편적 현상”이라며 “핵심 역량만 강조하면 삼성은 아직도 양복과 설탕만 만들고, 현대는 길만 닦고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의 경우 사업 다각화에 대한 기업의 의지도 있었지만 정부가 어떤 사업을 하라고 떠맡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순환출자 금지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과거에 지주회사도 금지하고 교차 소유도 금지하니 기업이 새 사업을 하려면 순환출자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를 문제라고 하는 것은 기업이 자라온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경제 민주화 이슈가 불거지는 이유를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국민들은 대기업이 혼자 큰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대기업들도 이런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 교수는 경제민주화의 본질은 대기업 개혁이 아니라 복지국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사회 대타협’과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두 가지를 제시했다. 대타협은 대기업이 국민의 지원 아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수익을 올린 만큼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라는 것이다. 또 정부는 복지를 강조하면 성장에 저해된다고 강조할 게 아니라 복지 확대가 성장을 뒷받침하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세금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세금을 몇 퍼센트니 하는 숫자로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걷은 세금을 잘 쓰게 하느냐, 정부가 효율적으로 세금을 집행하는지를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대기업에 비판적 입장을 지녀 왔지만, 대기업 개혁에 대해서는 다른 진보학자들과 다른 견해를 피력해 왔다.

그는 2005년에 펴낸 저서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올해 펴낸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대기업 해체는 그룹으로부터 계열사를 떼어내라는 것이고, 이는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나드는 현실에서 결국 국제 투기세력에 한국 회사를 내주거나 혹은 다른 대기업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대기업 일가의 지배구조를 인정하는 대신 복지사회 건설에 대기업이 기여하도록 타협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장 교수가 삼성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 관계자는 초청 배경에 대해 “ 사장단 회의에는 각 분야에서 뚜렷한 식견을 갖고 있는 분들이면 누구나 초청할 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 주주자본주의

경영 목표를 단순히 기업의 이윤극대화에 두지 않고 주주들에게 최대의 배당을 안겨주는 것에 두는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경영진을 견제하기 위해 소액주주를 보호할 사외이사를 많이 둘 것, 주주의 의사 결정은 1주 1표 원칙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 원칙에 맞춰 운영하는 기업은 흔치 않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