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떠나요, ‘다른 삶’ 있는 제주도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들국화 멤버 최성원이 부른 ‘제주도의 푸른 밤’. 1988년 발표된 이 노래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현대 도시인의 로망이 듬뿍 담겨 있다. 그런데 20년이 훨씬 넘게 흐른 지금, 놀랍게도 이 로망이 현실이 되고 있다. 도시인들의 이주 행렬 덕분에 해마다 줄어들던 제주도 인구가 다시 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 이주? 처음엔 은퇴를 앞둔 베이비 부머들이겠지 싶었다. 막상 취재에 들어가니 의외였다. 직장생활하랴, 결혼해서 아이 키우랴 여념 없을 30대를 많이 만나게 됐다. 서귀포 바닷가 마을에 게스트하우스(서양식 민박집)를 차린 출판사 직원, 손수 구운 빵과 과자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카페 주인이 된 영화투자사 마케터, 대표이사 직함 대신 세 아이를 위해 섬생활을 택한 디자이너…. 이들은 최성원의 노래처럼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서 제주도로 온 사람들이다. 그중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영어학원 갔다가 출근해 밤 9시가 넘어 퇴근하던 37세 직장인도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여행 와 성산 일출봉을 오르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싶어 3년 전 옮겨왔다고 한다. 현재 그는 현지 특산물을 도시에 파는 마을기업 총무로 일한다.

 이들의 벌이는 서울에서보단 못하다. 직종도 대개 숙박·요식업에 집중돼 있다. 제주도에 내려와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상적이었던 건 “적게 벌어도 적게 쓰면 되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니 행복하다”는 이들의 한결같은 말이었다. 그들의 행복은 별거 아니다. 협재 해수욕장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중산간을 가득 메운 안개에 감탄하는 것, 밤이면 마당에서 맥주 한잔 기울이며 하늘에 총총한 별을 보는 것, 아침·저녁으로 온 가족이 얼굴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 등이다. 소소하지만 현대 도시인들이 좀처럼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제주 이주 열풍은 우리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증거다. 남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제공하는 삶이 아니라 부족하나마 있는 그대로 지금을 누리는 삶으로 말이다. 현택수(사회학과) 고려대 교수는 “공부 들입다 해서 ‘인 서울’ 대학 가고 대기업에 취직해 조건 적당한 배우자 만나 결혼해서 집 사는, 일반적인 삶의 ‘공식’이 깨지고 있는 신호”라고 분석한다. 반가운 공식 파괴요, 신호다. 다만 1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경험한 후 피로와 결핍이 심해 제2의 인생을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건 사회 전체로 봤을 때는 분명한 손실이다. 30대가 아니라 좀 더 일찍부터 남과 다른 진로와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공식 파괴’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