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예외지만, 종속이론은 아직 유효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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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만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종신교수는 “한반도는 여러 조건 때문에 남북 대치상황이 계속돼 왔는데, 앞으로 10년 내 통일과 관련된 중대한 변화가 있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뉴욕 월가를 분노한 시위대가 점거한 이른바 ‘Occupy(점령하라)’ 사태 발생 1년을 맞는 17일 오후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선 특별한 강연이 열렸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82) 예일대 종신교수가 경희대 미래문명원이 주최한 ‘Peace BAR Festival 2012’ 행사에 참석해 기조강연을 했다.

 이날 월러스틴은 “현재 자본주의는 한계를 맞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1970∼80년대 그가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며 그랬던 것처럼 명쾌한 대안은 내놓진 못했다.

 18일 오전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는 의미였다. 그는 세계 각 곳의 현안을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최근 동북아에서 불거진 영토 갈등, 중동지역에서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는 현상 등에 대한 견해를 쏟아냈다.

 - 정확히 1년 전 발생한 ‘Occupy’ 시위부터 되돌아보자.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봉기가 있었다. 미국 내에서도 월가만이 아니고 500여 도시에서 일어났다. 그 같은 집단적 열광이 앞으로 다시 일어난다고 확언하긴 어렵다. 두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하나는 미국에서 반자본주의적 행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99%’ 라는 슬로건이다. 실질적인 수입이 줄면서 몰락한 중간계급이 동참하며 사건이 퍼져나갔다.”

 - 최근 중동지역 미국 대사관이 잇따라 습격 당했다. 미국의 파워가 쇠퇴하리라는 주장을 오래 전부터 제기해왔다.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보나.

 “문제가 된 영화를 만든 집단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콥스’라는 기독교 단체가 있는데, 이들은 무슬림 국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극단적인 단체다. 그들이 문제의 영화를 만들어 유포한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통제되지 않는 작은 단체에 의해서도 반미 감정은 일어날 수 있다. 일반적 무슬림의 반감과 이런 상황을 이용하려는 알카에다 같은 테러집단의 반응은 구분해야 한다. 어쨌든 실질적으로 미국의 역할은 중동에서 약해진 듯하다. 원래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가 미국의 동맹이었는데 이 세 나라가 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문제가, 중국과 일본 사이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갈등이 높아지고 있다.

 “영토를 둘러싼 갈등은 오래됐다. 지금 문제는 바닷속 천연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갈등이다. 미국 헤게모니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중국·일본·한국의 민족주의 감정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20년 내 해결될 것으로 본다. 적어도 6개월 정도면 이 문제는 조용해질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지정학적 정치 전략이 아니다. 모든 나라가 선거에 임박해 나오는 과장된 수사학이다.”

 - 중국의 파워는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중국은 25년 전부터 경제적·정치적으로 강해졌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한다. 두 나라는 향후 30년간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모순을 내장하게 될 것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모순인가.

 “경제적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중국 국민들도 반미감정이 있고 미국 정치인들도 중국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치는 이를 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예컨대 최근 보도를 보면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을 어겼다 했는데 이미 몇 년간 그랬다. 오바마가 그걸 지적한 이유는 선거를 앞두고 국민적 감정을 염두에 둔 것이다.”

 - 올해 미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오바마가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 같다. 전 세계가 변화의 와중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미국 유권자들은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오바마를 선택하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 최근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상향시켰다. 당신의 세계체제론에 의하면 주변부 국가는 중심부 국가에 종속돼 발전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사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체제론은 약한 개발도상국이 강대국에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선진국가와 개발국가가 서로 협력·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경제적 발전에 따라서 관계의 축이 바뀔 수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의존하지만 한국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관계가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의존관계를 설명하는 종속이론이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종속이론의 여러 측면이 있다.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에 유효한 점이 있다.”

 - 한국과 미국의 의존관계는 어떻게 보는가.

 “한·미 관계는 냉전의 결과다. 한국의 의사보다 미·소 관계의 유산이다. 한·미 관계는 한국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미국이 한국 방위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한국인이 만족하고 그것이 발전의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나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의 지속 여부는 한국민의 결정에 달렸다.”

 - 세계 시스템의 관점에서 한반도의 미래는.

 “분단체제 자체가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 통일로 이득을 보는 국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다. 그러나 10년 내로 통일과 관련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 같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1930년 뉴욕 출생. 세계 정치·경제변동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유명하다. 세계체제론이란 용어를 회자시켰다. 1974년 발표한 논문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성장과 미래의 쇠퇴’와 같은 해 나온 대표작 『근대세계체제』는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후학들의 논문과 저서에서 인용되고 있다. 지난해 『근대세계체제』 제4권을 펴낸 현역이기도 하다. 컬럼비아대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후, 캐나다 맥길대 교수, 미국 빙엄튼대 교수와 부설 페르낭 브로델 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세계체제론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중심부 국가(선진국)와 주변부 국가(후진국)가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의존적으로 연계돼 있다는 학설이다. 70~80년대 한국에선 종속이론의 하나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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