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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과연 양극화의 주범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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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영욱
논설위원

경제민주화가 대세다.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다. 재벌개혁에도 한목소리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이 재벌개혁이란다. 경제민주화, 그 정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목적은 양극화 해소라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재벌개혁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데도 일치한다. 양극화 해소라는 목적을 위해 재벌개혁이란 수단을 쓰겠다는 게 경제민주화다. 양극화 해소와 재벌개혁, 이 둘을 떼놓고 보면 각각 다 일리 있다. 양극화 심화는 당면한 현실이고, 재벌 역시 고쳐야 할 문제가 많다.

 문제는 이 둘을 연결시킬 때다. 재벌을 개혁하면 양극화가 해소될까라는 의문이다. 바꿔 말하면 재벌이 양극화의 주범일까라는 질문이다. 외환위기 때는 재벌이 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곧 밝혀졌는데도 재벌개혁 바람은 거셌다. 오해 없기 바란다. 주범이 아니라는 거지, 책임이 없다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주범은 정부와 정치권이었다. 전환시대에 걸맞은 경제패러다임을 구축하지 못했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금융 개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이 주범임을 자인할 리 없다. 재벌이라는 다른 희생양이 필요했던 이유다. 이번 역시 그런 것 같다.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부터 그렇다. 재벌을 양극화의 주범으로 몰아붙이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정치권의 얄팍한 속내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벌은 양극화의 주범이 아니다. 당연히 재벌개혁을 아무리 해도 양극화는 별로 개선되지 않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미국을 보라. 재벌 없는 미국의 불평등은 우리보다 더 심하다. 구태여 양극화의 주범을 찾는다면 재벌보다는 세계화를 핵심 키워드로 하는 신자유주의, 그 언저리에서 찾아야 한다.

 더 이상한 건 연결고리다. 지금 거론되는 재벌개혁은 세 가지다. 상속과 오너 경영의 기업지배구조, 선단식 경영을 통한 경제력 집중, 중소기업과 영세상인에 대한 불공정거래 등이다. 그래서 수많은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금산분리 등의 지배구조 이슈에서부터 일감 몰아주기 금지, 중소기업 단체 협상권 허용,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의 동반성장 이슈까지. 가히 전방위적이다. 기존 재벌 규제까지 합치면 대체 가짓수가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안 될 정도다. 하지만 이처럼 수많은 규제 가운데 양극화 해소와 관련 있는 건 별로 없다. 재벌을 누가 경영하고 누구에게 승계하느냐라는 지배구조 이슈가 양극화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룹 총수를 감옥살이시킨다고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도 명백하다. 무엇보다 지배구조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과거에 양극화 문제는 훨씬 덜했고, 불공정거래는 훨씬 더 심했다.

 양극화 해소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건 불공정거래다. 하지만 그 관계도 그리 명확하지 않다. 재벌의 낙수효과 때문이다. 재벌과 거래하는 협력업체들의 수익률이 그러지 않는 업체들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 게다가 불공정거래를 금지해도 중소기업과 영세상인의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진 않는다. 그들의 저생산성 문제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잘된다고 그 과실이 종업원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희·정몽구 집안이 삼성과 현대차에 대한 영향력을 잃는다고 해도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해답은 재벌개혁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얘기다. 국민이 절실히 바라는 것도 재벌개혁이 아니라 일자리와 복지 아닐까. 양극화 해소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면 재벌을 닦달해선 안 된다.

 굳이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재벌개혁을 하겠다면 불공정거래에 집중하는 게 옳다. 양극화 해소를 외치면서, 이와는 아무 관련 없는 금산분리나 순환출자에 집착할 일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재벌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규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재벌을 개혁하면 양극화가 해소된다는 경제민주화론자들의 문제 의식이 틀렸다는 거다. 실효성 없는 규제를 백화점식으로 가짓수만 잔뜩 늘리는 목표 의식도 잘못됐다. 재벌을 바꾸고 싶다면 이래선 안 된다. 정확한 문제 의식과 목표 의식을 가져야 하고, 수단과 방식은 대단히 정교하고 실행 가능해야 한다. 무엇보다 길게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