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9회 2사서 야구 포기 … 팬 우롱한 김기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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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우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야구는 9회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다.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의 전설인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도 했다. 경기 종료까지 승부는 결정된 게 아니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12일 롯데도 9회 초 2사까지 KIA에 0-1로 뒤지고 있다가 3-1로 경기를 뒤집었다.

 하지만 김기태(43) LG 감독의 야구는 9회 2사까지밖에 없다.

 김 감독은 지난 1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SK와의 경기에서 아웃카운트 한 개를 남겨놓고 승부를 포기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김 감독은 0-3이던 9회 말 2사 2루에서 이만수 SK 감독이 마무리 정우람을 기용하자 강타자 박용택(33) 대신 투수 신동훈(19)을 타석에 세웠다. 대기타석에 있던 정의윤도 불러들였다. 신동훈은 타격할 의사 없이 멀뚱히 공 4개를 지켜본 뒤 스탠딩 삼진을 당했다. 그것으로 경기는 끝났다.

김기태 LG감독
9회 말 2사 2루에서 대타로 나선 LG 신인투수 신동훈이 삼진 아웃되고 있다. [뉴시스]

 3할 타자 박용택 대신 나온 신동훈이 올해 투수로 입단한 고졸 신인이라는 점과 대기타석에 타자를 세우지 않았다는 점은 경기 포기의 명백한 증거다. 김 감독은 신동훈에게 “가서 가만히 서 있다가만 와라”고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코치진의 만류에도 독단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순간 김 감독의 머릿속에는 팬도, 코치도, 선수도 없었다. 선수들이 포기하려 해도 다잡고 독려하는 게 감독의 역할인데 김 감독은 먼저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선수들의 경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의 경기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경기를 포기하는 것은 팬들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처사다. 이기려고 끝까지 분투하고,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 스포츠 종사자들의 의무다.

 김 감독은 13일 “경기 포기가 아니다. 상대의 투수교체가 우리를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보여주려고 그랬다. 1패보다 앞으로 2승, 3승이 중요하기에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팬들께는 죄송하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비판을 감수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방식도 잘못됐다. 상대의 의도적인 행동에 불만이 생겼다면 야구로 풀었어야 했다. 야구에서는 상대가 암묵적인 룰을 저버린 행위(큰 점수차로 앞선 팀이 번트나 도루를 하는 것 등)를 했다면 벤치클리어링(집단 몸싸움)이나 빈볼(위협구) 등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상대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해 불만을 품는 점도 이해하기 힘들다. 선수 기용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감독 고유의 권한이다.

 냉정을 잃고 감정에 휘둘린 점도 문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냉정을 잃은 지도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진 건 ‘파멸’뿐이었다. 냉정함을 잃은 지도자는 더 이상 지도자가 아니다. 앞으로 김 감독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선수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선수들을 질책할 수 있을까.

 LG는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이 거의 굳어졌다. 그럼에도 LG 팬들은 경기장에 나와 ‘내 팀’을 응원하고, 멋진 역전타가 터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김 감독은 자신의 지도자 경력뿐 아니라 LG 구단과 LG그룹의 이미지에도 먹칠을 했다. LG는 승부를 포기한 감독과 시즌을 끝까지 함께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김 감독은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책임을 지기 전에 그는 야구팬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허진우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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