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네 농민들 "배우가 따로 있나"

중앙일보

입력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 당북부락 주민들은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모심기하랴 밭에 모종하랴 농사도 그렇지만 진짜 바쁜 이유는 6월1일부터 시작하는 안성 죽산 국제예술제 준비 때문이다.

7년전 첫회 행사를 치를 때만 해도 농작물을 망가뜨리거나,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는 외지인들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이젠 으레 우리 마을 일이려니 해요. 낮에 밭 매다가도 저녁 먹고 이 곳(웃는 돌 캠프) 에 와서 연기 연습하고. 작년에 공연한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에서는 '마을주민1' 역을 했는데, 아마 연극에 출연한 이장은 전국에서 저 밖에 없을걸요"

25일 웃는 돌 캠프에서 만난 용설리 이장 구본철(40) 씨는 마을 주민 10여명과 미국에서 온 연극 연출가 에밀리 앤더슨(34) 과 단원 수전, 보니를 만나 올해 공연할 작품설명을 듣고 있었다.

예술제 사무국이 지난해부터 외국 유명극단을 초청해 주민들을 참여시키고 있는 마을연극을 논의하는 자리다.

올해 초빙된 단체는 미국 버몬트주에 본부를 둔 '브레드 앤 퍼펫' . 주로 야외무대에서 지역주민들과 작품을 만들어온 극단이다. 3~4m나 되는 거대한 인형과 소품을 직접 만들어 장대하고 활기찬 미국판 '마당극' 을 만든다.

최근 에는 쿠바와 대만.독일.벨기에 등지를 돌며 현지 주민들이 참여하는 무대를 꾸몄다. 사회.정치.환경문제 등 가볍지 않은 주제를 흥겹게 풀어내는게 특징이다.

이번 공연제목은 '단군신화' 다. 대사는 거의 없이 국악반주에 맞춰 출연자 30여명이 춤과 마임으로 꾸민다.

"작품은 모두 일곱개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전체 공연시간은 50분 정도예요. 하느님(환인) 의 아들 환웅이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나타날 때 배경에 세워질 구름과 불은 그림으로 그리고, 곰이 인간으로 변하는 웅녀는 대형 인형으로 만들거예요. 각자가 인형을 움직이고, 연기를 해야해요. 오늘은 인형부터 만들지요. "

막힘없는 연출자의 설명에 "그래그래, 그럼 시간이 없으니 인형 만들면서 짬짬이 춤을 익히도록 해요" 라고 거드는 사람은 배순자(61) 씨.

지난해 공연에서 주인공 바보온달의 어머니역을 맡아 동네 스타가 됐다. "큰 무대는 아니지만 이 나이에 무대에 선다는 게 쑥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래요. 모두 농사짓는 사람들이지만 작년 첫 마을연극 한 뒤론 마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임도 갖고 올해 예술제를 기다려왔어요.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계속됐으면 좋겠는데…"

마을 주민들은 최근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죽산 국제예술제가 올해로 막을 내린다는 소식에 서운한 표정이다. 10년전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주민 이동희(53) 씨는 "이런 행사를 통해 문화(예술) 에 대한 인식을 다시 갖게 됐다. 우리 마을이 내실있는 예술마을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고 밝혔다.

이들이 출연하는 '단군신화' 는 6월3일 오후 5시 용설리 야외무대에 오른다. 연출가 앤더슨은 "마을사람들의 적극적인 자세가 인상적이다. 프로극단 이상의 감동을 객석에 전달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자신했다.

■ 죽산예술제 운영 홍신자씨 인터뷰

주민들의 바램과는 달리 내년부터는 죽산에서 예술제를 보지 못할 것 같다.

8년전 죽산에 터를 잡고 매년 국내외 유명 공연단체가 참여하는 죽산 국제예술제를 운영해온 무용가 홍신자씨는 "열정을 갖고 추진해왔지만 고생도 많이 했고, 개인 창작활동에 소홀해졌기 때문" 이라며 "당분간 쉬고 싶다" 고 밝혔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개인사정만은 아닌듯 했다.

- 재정문제가 어려웠나.
"돈 문제도 그렇지만 경기도나 안성시에서 지원하는 예산심의 자체가 너무 늦어져 출연자 섭외를 비롯한 행사를 준비과정에서 심적 부담이 컸다. 주차장이나 도로.화장실 등 부대시설이 열악해 어려움이 많았다"

- 주민들은 매우 적극적인데.
"주민들에게 폐를 많이 끼쳤다. 주민이 참여하는 마을연극이나 예술제 마지막날 마련한 '우리 문화마을 사람들' 행사는 모두 주민들을 위해 만든 자리다"

- 앞으로 계획은.
"당분간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와 웃는 돌 무용단 작업에 충실하고 싶다. 행사는 1~2년 쉬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연축제를 기획할 생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