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계림에서 키운 꿈 그림으로 꽃 피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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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최수진(26)씨가 본인의 작품 ‘농담따먹기 숲’(부분) 앞에 묻히듯 섰다. 그는 “보고 있으면 저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게 좋은 그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회화의 맛과 멋, 그리고 시적 환상이 적절히 스며들었다고 평가했다. [박종근 기자]

경주에서 태어난 소녀는 무덤을 보며 자랐다. 어머니와 함께 첨성대·계림 일대를 산책하며 노을을 봤고, 교실 창밖의 왕릉을 보며 그 속의 보물과 시신,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

 때로 천식이 왔다. 살아가는 데 너무도 당연한 숨쉬기가 꼭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것, 그 사소한 일이 참 버거울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일찌감치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소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를 찾았고 더 오래 살고, 더 많이 얘기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지긋한 나이만큼이나 푸근한 얼굴로 모든 얘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할머니가 된 자신을 상상한다.

 올해 중앙미술대전이 꼽은 한국 미술의 새 주인공, 최수진(26)씨 얘기다. 그는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열린 제34회 중앙미술대전 개막·시상식에서 대상(상금 1000만원)의 영광을 안았다.

 경주에서 나고 자라 중앙대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으로 진학한 최씨에게 그림은 곧 삶이다. 서울 성산동의 작업실 겸 집 한쪽 벽을 꽉 채우고 그렸던 가로 362㎝ 캔버스의 유화 ‘농담따먹기 숲’은 철저히 ‘나와 우리 젊은이들’의 얘기다. 초목이 우거진 숲 속에 과자따먹기 게임이라도 제안하듯 줄들이 늘어져 있고, 거기 농담처럼 여러 이미지가 걸려 있다.

5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제34회 중앙미술대전 시상식. 왼쪽부터 김복기 운영위원, 우수상 수상자 박지혜, 대상 수상자 최수진, 송필호 중앙일보 부회장, 우수상 수상자 권혜원, 포스코 정창화 상무.

 홀딱 벗고 춤추는 남녀, 괴물, 나팔 부는 소년, 비키니 입은 배불뚝이 여자, 공룡 등. 가운데 계절 잊은 눈사람 옆엔 주황색 자전거를 타고 온 아가씨가 농담을 그러모아 치마에 담고 있다.

 최씨는 “젊은 사람들은 매일매일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진실과 거짓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게 된다”며 “어린이 놀이터를 떠난 나이의 우리에게도 편히 쉴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경주의 숲을 떠올리며 20대를 위한 놀이터를, 시각적이되 촉각적으로 질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렸다. 최씨는 “30대가 되고, 40대가 되어도 계속해서 그때의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를 그리고 있을 것”이라고 즐거워했다.

 ◆전시는 14일까지=중앙일보가 주최하고 포스코가 후원하는 중앙미술대전 올해 행사에는 지난 3월 403명이 응모했다. 심사위원 4명이 포트폴리오를 거르는 1차 심사를 통해 ‘선정작가’ 15명을 선발했다. 이들이 새로 제작한 작품을 고원석·김복기·백지숙·신보슬·정현 등 심사위원 5명이 전시장에서 직접 보며 토론했다.

 대상은 최수진씨, 우수상(상금 각 500만원)은 입체 부문의 박지혜(25·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 뉴미디어·영상 부문의 권혜원(37·영국 레딩대학 박사과정)씨에게 돌아갔다.

 전시는 14일까지 열린다. 1978년 시작된 중앙미술대전(fineart.joins.com)은 국내 젊은 미술가들의 대표적 등용문이다. 김복기 아트인컬처 발행인 겸 편집인은 “중앙미술대전은 국전이라는 관 주도 공모전의 폐해에 맞서 출범한 민전(民展)의 효시다. 그간 배출한 작가들의 면면은 곧 한국현대미술사와 그대로 겹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시기간 중 무휴. 02-2000-6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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