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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발상 돋보이는〈투발루〉

중앙일보

입력

남태평양 산호섬 이름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영화〈투발루(Tuvalu)〉는 관객의 상식을 기분좋게 배반하는 '깜찍한' 작품. 화면마다남태평양의 싱그러운 바람과 첨단문명을 거부하는 원시의 건강함이 느껴진다.

찾는 사람이라고는 부랑자밖에 없는 낡은 수영장에는 세상 밖을 두려워하면서도늘 탈출을 꿈꾸는 안톤(드니 라방)이 눈먼 아버지와 뚱뚱한 관리인 아줌마와 함께지낸다. 아직도 수영장이 손님들로 붐비는 것처럼 믿게 하기 위해 안톤은 녹음된 테이프를 아버지에게 들려주고 아줌마는 돈 대신 단추를 입장료로 받는다.

어느날 아름다운 소녀 에바(슐판 하마토바)가 선장인 아버지와 함께 수영장에찾아온다. 안톤은 에바의 매력에 흠뻑 빠져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수영장 건물을 철거하고 돈을 챙기려는 안톤의 형 그레고어(테렌스 질레스피)가 나타나 수영장은 위기에 빠진다.

사고로 숨진 아버지의 유품에서 '환상의 섬' 투발루로 향하는 해도(海圖)를 발견하고 항해를 준비하던 에바는 배의 기관 수리에 필수적인 부품을 수영장 모터에서훔쳐내다가 안톤과 실랑이를 벌인다. 안톤은 형의 간계로 아버지가 숨지고 수영장건물까지 무너지자 평소 꿈꿔오던 유토피아를 찾아 에바와 함께 항해를 시작한다.

단편영화를 만들 때부터 전세계 영화제로부터 '러브 콜'을 받아온 파이트 헬머는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천재다운 신선한 발상과 신예답지 않은 고전적 방식을 동원했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낡은 조명장치로 따뜻한 질감을 만들어내고 흑백필름위에 채색을 함으로써 장면별로 독특한 이미지를 꾸며냈다. 더욱이 편집기도 쓰지않은 채 책상 위에서 손으로 필름을 자르고 이어붙이며 옛 장인들의 숨결을 재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은 결코 제목처럼 곱지는 않다. 화면은 늘 비가 내리는 것처럼 거친데다가 주무대인 수영장도 낡은 목욕탕을 연상시킨다. 녹이 슨 샤워기, 밟으면 꺼지는 타일 바닥,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게다가 여주인공을 빼놓고는 모든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심지어 멋져보여야 할 남주인공마저.

그럼에도 영화 전편에 걸쳐 보석같은 장면이 쉴새없이 이어진다. 에바가 어항에담긴 금붕어와 함께 농염한 알몸 차림으로 유영하는 광경이라든지 돈 대신 단추로입장권을 사는 장면, 부랑자들이 지붕에서 우산을 들고 비새는 천장을 막아주는 대목, 안톤과 에바가 배의 키를 잡으려고 다투다가 사이좋게 서로 한쪽 눈을 대고 쌍안경을 보는 장면 등은 극장 문을 나서도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아 있다.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하는 드니 라방의 마임 같은 연기와 슐판 하마토바의 청순하면서도 요염한 매력도 돋보인다.

부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의 관객들이〈투발루〉에 최고의 찬사를 안겨주었으며 산세바스찬 영화제 등의 심사위원도 파이트 헬머에 대한 기대감을 신인감독상으로 표시했다.

호칭이나 감탄사 말고는 대사가 거의 나오지 않아 줄거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흠. 객석에 앉기 전에 영화관에서 나눠주는 팸플릿을 한번쯤 훑어보는 것이도움이 되나 여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름대로 영화를읽고 느껴도 즐거움이 반감되지 않는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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