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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 차이나] 탕더강(唐德剛)의 십년일변론(十年一變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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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더강(唐德剛, 1920~2009). 구술사(口述史) 분야에 있어 세계 최고의 역사가다. 그는 민국시대 국립중앙대학(현 난징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뉴욕시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리쭝런(李宗仁), 후스(胡適), 장쉐량(張學良), 구웨이쥔(顧維鈞)등 중국현대사의 기라성 같은 주역들이 그의 붓끝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탕더강의 『리쭝런(李宗仁) 회고록』은 회고록의 전범(典範)으로 불린다. 리쭝런은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북벌에 참가했던 국민당 정부의 장군으로 부총통에 총통대리까지 지냈으나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결국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치가이다. 탕더강 교수는 망명중인 리쭝런을 미국에서 3년에 걸쳐 168회나 회견했다. 탕교수는 작성한 초고를 정상급 중국 전문가 9명과 함께 사실에 착오가 없는지 검토했다. 리쭝런의 눈으로는 본 사건이라도 전문가들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론하면 그 내용을 충분히 새겨 반영했다. 주관적으로 치우치기 쉬운 회고록에서 객관성을 최대한 지켜내려는 장치였다.

탕더강 교수는 말년에 『만청70년』이란 대작을 남겼다. 탕교수는 저서에서 ‘역사삼협(歷史三峽)설’을 펼쳤다. 중국의 역사가 봉건제, 황제제, 민치(民治) 세 단계로 전환을 거쳤다는 주장이다. “봉건제에서 황제지배체제로의 전환은 상앙(商?)의 변법으로 시작해 진시황와 한무제까지 약 300여 년이 걸렸다.” “황제체제에서 민치로의 전환은 아편전쟁 뒤에 시작됐다”고 탕 교수는 말한다. 이 역시 약 2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오는 2040년경 중국 역사는 두 개의 ‘장강삼협(長江三峽)’을 완성할 것이다. 당(唐)나라 시인 왕만(王灣)이 ‘북고산 아래서(次北固山下)’란 시에서 “조수는 잔잔해 양안이 넓고, 바람이 순조로워 돛을 높이 단다(潮平兩岸闊, 風正一帆懸)”고 노래한 새로운 역사시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천년불변론(千年不變論)’이란 역사관이 바탕이다. 황제체제가 2000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회보다 강한 국가가 거의 모든 변화를 막았다는 논리다. 탕 교수는 중국의 자아도취적인 중화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2000년 동안 왕조가 바뀌고, 농민폭동이 일어나고, 중원은 전쟁에 휩쓸리고, 이적(夷狄)은 번갈아 침공했다. 백성들의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문화’는 숭고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스스로 잘난 체하여 교만하고(自高自大), 스스로 뽐내며 흡족히 여기고(自慢自足), 위에서 내려다보며(居高臨下), 교만하게 주변 오랑캐를 깔보았다(傲視四夷). 문화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한족중심주의(Sinocentrism)’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전통 ‘중국’이 ‘사이(四夷)’를 능가했다는 중심주의적 관념은 상주(商周)시대에 이미 싹텄지만 진(秦), 한(漢)의 ‘대일통(大一統)’ 후에는 흔들리지 않게 됐다. 후한(後漢)의 가(家)제도가 동아시아인에 개념적으로 천하의 통례가 됐다. 군신부자(君臣父子), 빈부귀천(貧富貴賤), 남존여비(男尊女卑), 사농공상(士農工商) 등 사회기구, 생활양식, 계급관 등이 당연시 됐다”고 설명했다.

탕 교수는 ‘천년불변론’에 이어 아편전쟁 이후 2차 전환기에 접어들면서 10년마다 한 차례씩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는 ‘십년일변론(十年一變論)’을 펼친다. ‘십년일변론’의 구체적 내용은 이렇다.

▶1840년 아편전쟁: 영국과 전쟁에서 패배해 42년 난징(南京)조약으로 개국한다.
▶1850년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 1853년 난징을 점령하고 1864년까지 독립왕국을 수립했다.
▶1861년 외교부 설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립해 서구식 외교활동을 시작한다.
▶1870년 이홍장(李鴻章)의 양병양조(洋兵洋操): 이홍장이 북양대신에 취임해 군대 근대화를 추진한다.
▶1888년 강유위(康有爲)의 군주입헌: 변법파가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개혁운동을 시작한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의 부청멸양(扶淸滅洋): 열강의 중국침략에 반대하는 배외 농민운동을 펼친다.
▶1911년 쑨원(孫文)의 민국건립: 신해혁명으로 왕조체제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다.
▶1919년 후스(胡適)의 전면서구화: 천두수(陳獨秀), 후스의 신문화운동이 서구사상에 따라 유교를 비판한다. / 5·4운동: 반제민족운동이 앙양되고, 1921년에는 공산당을 창당한다.
▶1929년 국민당 통일: 국민혁명의 북벌전쟁에서 군벌지배를 타도하고 국민당이 전국을 통일한다.
▶1939년 항전: 1937년부터 항일통일전선에 따라 일본군과 항일전쟁을 시작한다.
▶1949년 인민중국의 건국: 공산당의 전국 통일, 중국혁명이 성공한다.
▶1959년 대약진: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하는 급진적 증산운동으로 중국경제가 혼란에 빠진다.
▶1969년 린뱌오(林彪) 등 4인조의 문화대혁명: 마오쩌둥 파와 반(反)마오쩌둥파의 노선투쟁으로 대 혼란이 시작된다.
▶1979년 제11기3중전회: 개혁개방 정책 시작. 덩샤오핑(鄧小平)시대가 개막됐다.
이후 1989년에는 천안문사건이 발생했다. 황제체제에서 민치로의 2차 전환은 진시황이 발동한 전환기와 다르게 내재적 전환이 아닌 서구열강이 일으켰다. 고통이 더욱 극심한 이유다.

『만청70년』 서론 가운데 탕더강 교수의 주장을 계속 들어보자.

◇‘십년일변(十年一變)’은 ‘전형(轉型, pattern change)’의 단계
동방의 ‘한족(漢族)중심주의’적인 우주관은 어떻게 수 천 년간 ‘돌파(breakthrough)’되지 않았을까? ‘사회보다 강한 국가’식의 정치경제 구조는 어떻게 2000년간 ‘전형(pattern change)’를 겪지 않았을까? ‘천년불변’의 중국 구제도가 19세기 중반 즉, ‘아편전쟁(1839~1842)’ 이후 갑자기 ‘십년일변’ 체제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아편전쟁 발발 10년이 지나지 않아(1850) 유교, 불교, 도교 3가지 종교를 혼합한 홍수전(洪秀全)이 등장했다. 다시 10년 후에 정치제도상 2000년 간 없었던 외교부(총리아문)이 생겨났다. 그 뒤 이홍장(李鴻章)의 서양식 군대의 서양식 훈련, 강유위(康有爲)의 군주입헌, 의화단의 부청멸양(1900), 쑨중산(孫中山)의 민국건립(1911)과 후스(胡適)의 전반서화(1919)까지 거의 모두 십년일변에 속했다. 매 차례의 변화는 모두 전통 중국에서 천 년 동안 변하지 않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다시 ‘5·4’(1919)이후 발생한 이 사건들을 우리가 기록해보면 매 10년마다 서로 다른 중국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29년 국민당의 통일과 내전, 1939년 항일전쟁, 1949년 인민중국 건국, 1959년 대약진, 1969년 린뱌오, 4인방의 문혁, 1979년 3중전회, 1989년 6·4, 1999년? 모두 십년일변일 뿐만 아니라 매 변화로 인해 등장한 중국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매 변화 하나하나가 과거 중국에서 천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 아닌가?

옛말에 이르길 “난세의 사람으로보다는 태평 시절의 개로 태어나고 싶다(寧爲太平狗, 不作亂世人)”고 했다. 필자 세대의 불행한 삶은 개만도 못한 난세에 살았기 때문이다. 7~8차례 세상이 뒤바뀌면서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도대체 이 난리는 어디까지 계속 될까? 이는 우리가 불행히도 중화민족사상 두 번째 ‘전형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십년일변’은 바로 전형의 단계다. 사회의 전환은 고통스럽고 장기적이다. 특히 이 두 번째 전환은 더욱 심하다. 이는 자발적이고 점진적이지 않다. 서방제국주의의 핍박아래서 격렬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발생했다.

중국의 ‘2차 전형’으로 어떤 모습의 중국이 탄생할까? 우선 서구를 보자. 부락전통을 벗어나지 못한 로마 공화국은 안으로는 번진의 발호와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이후 이민족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정신적으로는 통일을 이뤘지만 정치조직상으로 사분오열됐다. 9세기 이후 중국의 춘추시대와 같은 봉건시대로 들어갔다. 중국이 전국시대말기 제자백가 시대가 펼쳐졌듯이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1300~1600)가 출현했다. 서구가 동아시아보다 1500여년 늦은 셈이다. 포스트 봉건시대의 발전과정에서 동방은 국가가 사회보다 강한 대제국이 탄생했다. 유럽에서는 민족국가의 상호 무한 경쟁시대가 시작됐다. 급속히 발전한 항해술은 무한약탈의 대식민제국을 만들어냈다.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의 재화들은 유럽으로 옮겨져 공업혁명을 이뤄냈으며 도시 중산계급이 빠르게 탄생했다. ‘사회가 국가보다 강한’ 모델에 입각한 서구 국가들이 생겨났다. ‘유럽중심주의’적인 우주관이 세계를 지배했다. 이들의 우주관에 저촉되는 모든 것을 야만이 아닌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황혼의 ‘한족중심주의’가 신흥 ‘유럽중심주의’와 맞부딪치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한족중심주의’의 ‘유럽중심주의’로의 양위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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