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미국의 평범한 비서, 아프리카 여왕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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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여왕 페기
페기린 바텔스·엘리너 허먼 지음
김미정 옮김, 세종서적
544쪽, 1만 4000원

미국의 평범한 비서가 아프리카 여왕이 된다. 도통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화다. 가나에서 태어나 20대 중반에 미국 워싱턴 D.C.로 이주한 페기린 바텔스(59)는 4년 전 고향의 친척으로부터 “오투암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됐다”는 전화를 받는다. 오투암은 7000여 명이 사는 가나의 작은 부족 마을. 페기의 조상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25년간 부족의 왕으로 봉직한 외삼촌이 서거하면서 차기 왕으로 페기가 추대된 것이다.

 책은 페기가 왕으로 간택된 후 2년 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워싱턴 주재 가나 대사관에서 비서로 30여 년간 일하며 미국 시민권까지 받은 그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셈인데, 그를 가로막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빈곤이다. 오투암은 전기·수도·교통 등 기간 시설이 전무했고, 고등학교가 없어 아이들의 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남성 원로들의 부정부패로 가난의 고리를 끊기가 어려웠다. 페기는 이런 오투암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또 외삼촌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밝히고, 부정한 관리들을 솎아낸다. 난국을 헤쳐나가는 페기의 이야기는 소설보다도 더 극적이다.

 오투암을 희망의 땅으로 변화시켜나가는 페기의 리더십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페기는 1년에 5~6주만 오투암으로 건너가 통치한다. 평소에는 전화로만 보고를 받는데, 다양한 배경의 인물을 정치에 참여시키면서 견제가 가능한 통치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책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이 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미국인에 가까운 페기가 자신의 고향을 이해하는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아프리카인들의 국민성, 역사 의식, 사회 문제 등을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다.

 페기는 여전히 미국의 작은 아파트에 산다. 그리고 아침마다 1992년식 혼다 자동차를 운전해 대사관으로 출근한다. 권력은 나눠갖지만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는 여왕의 모습은 후덕한 그의 인상과 겹쳐지며 따뜻한 울림을 준다. 그가 일으킨 변혁의 바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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