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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속살은 착각·헌신·질투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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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박형서의 작품에는 ‘변신’이 다양하게 변주돼 나타난다. 그는 “변신이란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라며 “소설가에게 삶의 감춰진 이면을 탐구할 의무가 있는 한, 변신 모티브의 중요성과 당위성은 손상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사랑은 맹목(盲目)에서 자란다. 눈 멀지 않고, 눈에 뭐가 씌지 않고서 사랑에 빠져들 수 있을까. 착각과 오해에서 비롯한 사랑은 ‘눈 먼’ 사랑의 무모함과 폭력성을 건너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박형서(40)의 단편소설 ‘끄라비’는 작가의 말대로 소설 전체가 사랑에 대한 은유다. 미얀마에 머물고 있는 그는 e메일로 “사랑의 헌신과 질투, 결합에 대한 사랑이야기”라고 말했다.

 끄라비는 태국에 실존하는 공간이면서 소설의 배경인 동시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다. 게다가 살아 숨 쉬는 인물처럼 주인공인 나와 감정을 나누며 사랑하고, 질투하며 분노를 폭발시킨다.

 주인공인 내가 처음 끄라비에 머물렀을 때는 우기였지만 날씨는 맑았다. 내가 떠나는 순간에야 끄라비는 이별을 슬퍼하듯 빗방울을 뿌린다. 그곳의 호의를 잊지 못한 나는 2년 뒤 실연의 상처를 안고 그곳을 다시 찾고, 끄라비는 우기임에도 맑은 날씨를 선사한다. 또다시 찾아온 작별의 순간, 흩날리는 빗줄기를 보며 깨닫는다. 끄라비가 나를 사랑했음을.

 나를 향한 끄라비의 연정을 알면서도 나는 5년 뒤 애인을 대동하고 끄라비를 찾는다. 끄라비의 사랑을 시험하면서도 끄라비의 질투가 두려운 듯 우기가 아닌 건기를 택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죠. 누군가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을 일부러 모욕하는 행위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상대의 사랑의 깊이를 측량하고 신뢰할 만한 관계가 될 수 있을 지 검증하며 내 마음의 어지러움을 고백하죠.”

 마음을 짓밟힌 끄라비는 돌변한다. 건기임에도 쏟아지는 폭우는 나의 애인을 휩쓸어버릴 듯 맹렬하고, 나의 기억 속 다정했던 끄라비는 난자당한다. 소설 속 나의 말처럼 ‘(내가) 다정한 배려에 미혹돼 있는 동안 끄라비는 제 사랑을 지극히 노골적인 집착으로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끄라비의 집착에 넌덜머리를 내며 돌아온 나의 일상도 무너져 내린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순간, 끄라비에 대한 그리움이 고개를 들고 나는 도둑처럼 끄라비로 숨어든다. 한 발 늦은 깨달음과 고백이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인 듯, 나는 끄라비에 화해를 청하지만 나의 배신에 망가지고 피폐해진 끄라비는 무심하다. 나는 끄라비에서 죽는다.

 “주인공인 나는 엉망이 돼 가는 생활 속에서 끄라비에 대한 관계를 망친 자신의 잘못을 깨닫죠. 마지막에 끄라비에 갈 때는 인간적인 사랑을 품지만 끄라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합니다. 결국 스스로 다가가 끄라비의 일부가 되는 거죠.”

 사랑에 헌신하다 배신당한 한쪽과 그 사랑을 시험하다 뒤늦게 사랑을 깨닫는 다른 한쪽의 이야기. 소설의 구조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그렇지만 상상력·유머·지식의 삼박자를 겸비한 채 연애와 판타지, 과학소설(SF), 신화와 정신분석을 넘나들며 ‘전방위 이야기꾼’이란 평을 듣는 박형서의 손을 거친 이야기는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예심 심사위원인 백지은씨는 “끄라비의 폭우와 정념·사랑이 맞닥뜨리는 그 폭발력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박형서=1972년 춘천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10년 대산문학상 수상.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핸드메이드 픽션』, 장편소설 『새벽의 나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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