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총수 횡령·배임 엄벌이 재벌 개혁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어제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하고 그를 법정구속했다. 재벌 총수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재계에서는 법원의 변화된 자세가 정치권에서 불고 있는 ‘경제민주화’ 바람과 맞물려 기업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재판부는 그룹 계열사를 동원해 위장계열사를 부당 지원하고 계열사 보유주식을 누나에게 저가로 양도해 각각 2833억원, 141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그룹의 지배주주라는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본 것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건 실형을 선고한 이유다. 법원 측은 “경제범죄에 대해 엄정한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의 여론을 반영해 2009년 만들어진 양형(형량 결정)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판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간 대기업 회장들에겐 경영 악화 우려 등을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재벌 총수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정찰제 형량”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김 회장에 대한 실형 선고는 이러한 암묵적 관행이 사실상 그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는 횡령·배임 같은 경제범죄도 그 지위가 무엇인지를 떠나 양형 기준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내가 오너(주인) 아니냐’는 생각에 기업 돈을 맘대로 빼다 쓰는 일이 교도소 갈 각오까지 해야 할 위험한 행동이 된 것이다.

 이번 실형 선고는 여야 대선 후보들이 앞 다퉈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경제민주화 논의에도 시사점을 준다. 판결문은 “압수 문서에 따르면 CM(체어맨·김 회장을 지칭)은 신(神)의 경지이고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라고 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런 기업 문화에 기반한 경영권 오·남용은 횡령·배임과 공정거래법 등 규정만 엄정히 집행해도 순환출자금지 등의 논란 없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이미 마련된 법적 장치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재벌의 폐해와 부작용을 키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벌 개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