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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과학기술계 홀로서기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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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기철
국가과학기술위원

스페인 남쪽 도시 코르도바는 메스키타라는 독특한 대형 사원으로 유명하다. 8세기에 지은 이슬람 사원 내부에 16세기에 지은 가톨릭 성당이 공존하고 있어 종교를 초월하고 시공을 넘나드는 문화와 역사가 자리한다. 융합과 공존의 상징이며 이교도 간 상호 신뢰의 역사적 유산이 바로 ‘코르도바 정신(Spirit of Cordoba)’인 것이다.

 이제 융합과 개방은 글로벌 화두이자 시대정신이 되었다. 융합이 이루어지려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개방을 통한 가치의 공유도 가능하다. 지난달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IMD)은 우리나라의 과학과 기술 경쟁력 순위를 각각 5위와 14위로 발표했다. 조사 내용을 분석해 보니 한국 과학기술계와 정부 간 협력과 신뢰가 있다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리란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다.

 현 정부가 1년 전에 설치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연구개발 사업의 기획과 자원의 배분·조정을 과학기술계가 주도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기구다. 선진국에서도 벤치마킹을 서두르고 있는 체제다. 지난 5월 문을 연 기초과학연구원은 과제 중심이 아닌 탁월한 연구자 중심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기존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전환기에 서 있다. 그 핵심 동인은 연구의 자율성이다. 그런데 과학기술계가 자율성을 진정으로 향유하려면 몇 가지 책무가 뒤따른다.

 첫째, 연구 현장에 건전한 문화 정착이 필요하다. 정부의 도움 없이도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홀로서기 의지와 함께 스스로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 도덕성이 확립되어야 한다. 연구비의 부적절한 집행, 논문 조작 등 떳떳하지 못한 행태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정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연구 자율성을 얻기 위한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한다.

 둘째, 자율적 개방으로 외부와 소통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 『장자』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편협한 지식인을 뜻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변화의 바람과 물살에 자신을 맡기고 시장과 소통하면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할 때 비로소 자율에 이를 수 있다. 진화의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하면 타율에 의한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기 십상이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변화 역시 내부의 동력이 자율적으로 용솟음쳐야 성공할 수 있다. 타율에 의한 변화는 저항감과 불안감의 증폭으로 돌아올 뿐이다.

 셋째, 창의적 혁신과 전략적 위기관리를 함께 추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위기 대응력과 변화의 원동력을 동시에 지닌 수단이기도 한 과학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술혁신의 필연적 과정인 ‘죽음의 계곡(한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 어려움이 중첩되는 고비)’을 넘으려면 기존의 성공 방식을 뛰어넘는 고난 극복 유전자도 필요하다.

 이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틀을 짜야 할 때가 왔다. 낡은 판을 새롭게 바꿔야 하는데 과학기술계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희망찬 미래보다는 우울한 시나리오에 자신을 가두려 하고 있다. 출연연구소 선진화라는 명제의 본질을 잊은 채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비관을 자초해선 안 된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접근할 경우 해결 구도를 더욱 어렵게 하고 급기야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우려를 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구활동의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열정으로 임한다면 벌써 위기 해결의 실마리는 찾은 셈이다. 과학기술은 현재를 변화시키고 미래사회의 희망을 밝히는 동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기철 국가과학기술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