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인하 기대감 벌써 솔솔 물가·가계부채 추이가 변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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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20면

축구장 몇 배 크기의 항공모함은 여간해선 방향을 틀지 않는다. 뱃머리를 돌린다면 국가안보정책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기준금리정책은 국가경제의 항공모함과 같다. 한 번 방향을 잡으면 상당 기간 그대로 간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2일 월례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3.0%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지난해 6월 기준금리를 올린 뒤 13개월 만에 바꾼 것이다. 금리를 내린 건 2009년 2월 이후 41개월 만이다. 시장에선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그동안 한은은 스스로 이야기해 온 금리 정상화, 즉 금리 인상의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들어오던 터였다. 하지만 앞으로를 눈여겨봐야 한다. 한번 인하로 방향을 틀면 인하의 유인이 커진다.

3년여 만에 기준금리 내려

경기둔화 위험 수위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주요 수단인 정책금리를 인하하면 장·단기 시장 금리가 함께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또 정책금리 인하가 발표되는 날이면 금융시장에서는 주가가 큰 폭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한은의 금리 인하가 발표된 당일에는 코스피가 전날보다 2.2%나 급락하고 원-달러 환율도 올랐다. 아마도 시장에서는 금리 인하로 인한 경기활성화 기대감을 키우기보다 통화 당국이 현 상황을 예상보다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 더 눈길을 준 듯하다.
한은이 시장의 예상과 달리 금리를 내린 배경은 한마디로 물가나 가계부채 문제보다 경기 하강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처한 대내외 여건을 살펴보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연장선상이라 할 유럽 재정위기의 여파로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달 들어 기준금리를 또다시 내렸다. 유럽에서 비롯된 글로벌 불황은 국제 금융시장과 신흥국 실물경제로 급속히 파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의 4분의 1을 점하는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2분기에 고용 안정을 위한 마지노선인 8%를 밑돌아 경제의 경착륙 우려마저 제기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물론 우리 정부와 한은도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3% 정도로 하향 조정하고 있다. 그나마 2%대에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물가가 위안이다. 물가 안정은 한은의 금리 인하를 뒷받침하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이번 금리 인하가 경기 하강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혹여 물가 상승이나 가계부채 증가 등 부작용을 키우지는 않을까.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치닫는 가장 주된 원인은 유럽 재정위기와 해외 경기 둔화다. 우리나라 수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정책금리 인하가 큰 힘을 발휘하려면 은행 대출 금리 등 시장 금리가 하락하고 소비와 투자 등 내수경기가 살아나야 한다. 그런데 이 경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경기 둔화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고, 기업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투자에 계속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은행이 대출을 늘리려 해도 이래서는 자금 수요가 크게 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대내외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한 차례의 금리 인하는 역부족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금리 인하의 부작용은 어떠한가. 금리 인하가 물가에 부담을 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방금 이야기한 맥락에서 볼 때 총수요 압력이 둔화하는 경기 하강 국면에서 지나친 인플레 걱정은 잠시 접어 둘 필요가 있다. 더 큰 우려는 경기 둔화와 디플레일 것이다.

금리 인하 영향은 제한적
한국경제의 큰 부담인 가계부채 문제가 이번 금리 인하로 더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쪽도 있다. 그러나 흔쾌히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를 보면 상당 부분 주택담보대출이다. 주택담보대출의 95% 이상이 변동금리조건이라는 점에서 금리 하락은 이자 부담 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한은은 이번 기준금리 인하로 시장에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앞으로도 이런 기조가 지속될 것인지가 관심거리다. 향후 금리 결정은 다음과 같은 요인에 달렸다.

첫째는 유럽 재정위기의 진전 상황과 이에 따른 해외 경기의 회복 속도다. 유럽 상황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유럽 사태가 한두 해 안에 치유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수출을 뒷받침할 해외 경기의 이른 회복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둘째, 주요국의 금리정책이다. 해외 경기회복이 지연되면서 선진국은 정책금리 인하와 양적완화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금리정책과 공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셋째로 국내 물가다. 글로벌 경기둔화에 따른 수요압력 둔화로 당장 인플레 압력이 크게 나타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대 인플레이션은 지금도 3.7%로 여전히 물가안정 목표치 3%를 웃돈다. 마지막으로 가계부채 문제다. 만약 금리 인하가 다시 가계대출 증가와 연체율 상승으로 이어진다면 추가 금리 인하 여지는 줄 것이다.

한은이 금리 인하로 방향을 튼 것은 맞다. 그러나 대내외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언제 어느 정도의 속도와 규모로 금리 인하를 할지 예단하긴 힘들다.



이승호 2010년까지 21년간 한국은행에서 주로 국제금융ㆍ외환정책 관련 분야에서 일했다. 2006부터 3년간 국제통화기금(IMF)에 파견돼 연례 경제정책협의 업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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