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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가족 아들·딸 28명, 함께 체험하고 진로고민 나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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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에서 직장을 다니는 정종원(45·서울 양천구)씨는 매주 금요일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온다. 집에 도착하면 거의 자정이다.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자고 싶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어김없이 새벽 6시30분에 깬다. 5년째 이어온 가족봉사를 가기 위해서다. 폭우가 쏟아졌던 지난달 30일에도 정씨는 아내와 초·중학생 남매를 데리고 서울 금천구에 있는 한 사회복지관을 찾았다. 정씨 가족 외에 열네 가족 40여 명이 봉사에 참여했다. 9년 전 역사체험학습을 함께 하며 모이기 시작해 지금은 열네 가족 45명이라는 대가족을 이뤘다. 싹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숲이 된다는 뜻의 ‘아름드리 새싹’이란 이름으로 체험학습·봉사·진로교육·학습법 강의 등을 공유하고 있다. 정씨는 “한가족이었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러 가족이 뭉쳐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열네 가족 45명으로 구성된 ‘아름드리 새싹’은 9년 전 역사체험으로 만나 지금은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역사체험으로 시작해 5년째 가족 봉사

“아들들, 할머니들에게 먼지가 해로우니까 깨끗이 닦아.” 김철근(46·서울 양천구)씨가 초·중·고교생 자녀들을 데리고 복지관 이곳저곳을 다니며 말했다. 그 속엔 다른 집 자녀들도 섞여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오래 봐서 그런지 모두 내 아들 같다”며 웃었다. 모임 회원들은 이곳에서 장애인 시설과 경로당 청소, 노인센터 무료급식소 배식 봉사를 한다. 올해로 5년째다. 1년에 한 번은 장애인들과 여행을 간다. 80여 명의 경비를 마련하느라 매달 바자를 열고, 직접 만두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방 청소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매니큐어를 가지고 할머니들에게 다가갔다. 무릎까지 꿇고 앉아 매니큐어를 칠하는 어민석(서울 강신중 3)군은 내내 진지한 표정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는 색색으로 물든 손톱을 보자 웃음이 번졌다. 한 할머니가 김관우(서울 강신중 3)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아이들이야. 내가 너를 낳았어.” 김군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손을 잡거나 말을 걸면 불편했는데 이제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윤지수(서울 명덕여중 3)양은 식사하는 할머니 옆에 앉아 조심스레 입을 닦아주고 숟가락에 반찬을 얹었다.

대가족이 함께 봉사하면서 아이들은 변했다. 최종엽(서울 강신중 3)군은 “봉사를 올 때마다 배우고 간다”며 “부모님이 나를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고맙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처음엔 주말에 왜 봉사를 가야 하느냐며 짜증을 냈지만 지금은 뿌듯해 한다”고 말했다.

 디자이너·시인·NGO 활동가 초청해 진로 교육

이 모임의 창단 멤버인 남수경(47·서울 양천구)씨는 2005년 초 같은 동네에 사는 네 가족과 체험학습을 함께 다녔다. 아이들이 유아 때부터 모여 동화책을 읽고, 놀이·공연관람 같은 활동을 했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역사 강의를 잘하는 도슨트(해설사) 한 명을 만났다. 강의가 재미있어 역사체험학습을 갈 때마다 그 도슨트를 초청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서울·경기는 물론 공주·부여·대전 같은 지역을 찾아 다녔다. 남씨는 “네 가족만 강의를 듣는 것이 아까워 가족 수를 늘리다 보니 어느새 열네 가족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소중함을 느껴 의지가 많이 된다”고 말했다. 5~6살에 만난 아이들은 지금 고등학생이 됐다.

지난해부터는 현직 종사자를 초청해 진로 강의를 듣고 있다. 자동차 디자이너·시인·국악전문가·NGO(비정부기구) 활동가 등 분야도 다양하다. 정종원씨는 “어느 날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하나같이 꿈이 없다고 했다. 다양한 직업을 접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 진로교육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상규 시인의 강의를 들은 초3 아이는 시인이 되겠다며 습작을 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강의도 듣는다. 신문이나 TV에서 학습법 관련 인터뷰를 한 대학생, 전문가 등에게 전화를 하거나 e-메일을 보내 섭외했다. 섭외는 엄마들의 몫이다.

 1년에 두 번은 가족 여행을 간다. 평소엔 바빠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빠들도 여행은 빠지지 않는다. 지난 겨울에는 강원도 화천 비수구미마을에서 1박 2일을 보냈다. 영하 10도가 넘고 얼음이 20㎝나 쌓이는 오지마을이었다. 코가 시릴 정도로 추운 방에서 대가족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김정아(39·서울 강서구)씨는 “편하고 좋은 곳보다 몸이 고된 곳으로 여행을 간다. 이런 추억이 핵가족화로 형제가 없는 아이들 간의 우애를 다져준다”고 말했다. 전유진(서울 강신중 3)양은 “친구·언니·동생들과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여행을 하며 아이들은 형·누나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멘토·멘티가 되기도 한다. 김정아씨는 “요즘 외동 아이들이 많은데 이 모임에서는 형제·자매를 맺을 수 있어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교육공동체를 이룬 열네 가족이 유니폼을 차려입고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회의록 작성 … 인원 많아 생기는 마찰 줄여

모임이 2~3년이 되고 가족 수가 늘면서 소통이 안 돼 어려움을 겪었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고, 자기 애들만 챙기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여행이 왜 필요한지 이유도 몰랐다. 회의 내용을 잘못 이해해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은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었다. 각자 회의록을 쓰도록 해 인원이 많아 생기는 마찰을 줄였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도 화합을 위해 자제했다. 특히 말조심에 신경 썼다. 채정순(42·서울 양천구)는 “다른 가족에 대한 험담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입한 가족과 빨리 친해지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도 장수 비결이다. 정기모임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어색한 가족도 여행을 가면 금방 친해진다.

 처음 모임 회원 중 17명을 제외하면 모두 아이들이다. 초3부터 고1까지 다양하다. 중학생 또래가 가장 많다. 엄마들은 가급적 공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서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어서다. 내 아이보다 전체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10년 가까이 만나면서 김태형(서울 광영고 1)군은 다른 부모들이 종종 친부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고민을 다른 엄마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다. 채씨는 “아이들이 성장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우리와 함께 삼대가 봉사와 체험을 함께 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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