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여수 엑스포 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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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논설위원

또 여수에 갔다. 태어나 지금까지 이 도시에 딱 두 번 가보았는데, 모두 여수 엑스포 때문이다. 지난번엔 엑스포 준비가 궁금해서였고, 이번에는 마음이 불편해서였다. 여수 엑스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집단 환불소동과 항의사태가 일어났다고도 했고, 흥행 실패 소식도 들렸다. 이런 소식에 마음이 불편했던 건 개막 전에 썼던 다소 감상적인 칼럼 ‘2012 바다이야기’(본지 3월 30일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 거다. 그래서 다시 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직접 보기 위해서.

 엑스포장은 지난 3월, 공사 때문에 어질러졌을 때와 완전히 달랐다. 들어가자마자 눈앞 천장에 확 펼쳐진 거대한 디지털 갤러리에선 고래와 물고기들이 헤엄쳤고, 눈이 닿는 곳마다 바다와 그 위에 흩뿌려진 섬들이 있었다. 한국관에 갔다. 삼면을 둘러싼 거대한 스크린 위로 우리네 연안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과 출렁이는 연안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나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가 되어 있었다. 옆방의 거대한 돔형 천장스크린 위엔 경제적 바다가 있었다. 어업·담수시설·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우리의 바다산업이 펼쳐지고,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을 실은 수출호가 그 바다에서 출항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안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북극의 날씨를 체험하는 기후환경관, 연극공연처럼 펼쳐진 해양기술관 등 솔직히 볼 만했다.

 나의 첫 엑스포는 취재차 갔던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였다. 드넓은 하노버 메세에 나라마다 개성 있는 건물을 올리고, 밀레니엄의 비전을 제시한다며 법석이었다. 선진국 전시관들은 지금 보면 좀 유치하지만 그때만 해도 첨단이라는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전시를 하며 IT기술을 뽐냈다. 세계가 한자리에서 벌이는 문명의 경쟁터에서 국가관마다 우열이 선명하게 비교됐다. 거기에서 왜 선진국을 선진국이라 부르는지 알게 됐다. 그때 한국관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소복을 입은 여자 마네킹과 짚으로 만든 전시물이었다. 그리고 줄 서지 않아도 무시로 들어갈 수 있는 한국관을 보며 일종의 서글픔이 몰려왔었다.

 여수의 한국관에서 나 홀로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은 아마도 이 옛 엑스포의 기억이 오버랩된 때문일 거다. 또 세계 엑스포 161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30만 명의 작은 해안도시가 엑스포를 유치하고, 엑스포장을 바다 위에 지어 주변 경관까지 살린 남다른 엑스포를 바로 우리나라가 해냈다는 점에서 나는 미리 감동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엑스포가 다른 산업박람회와 다른 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엑스포나 볼 만한 전시관 앞은 건물을 뺑뺑 돌아가며 줄이 늘어선다. 2~3시간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 기다리면서 성질을 내는 사람은 없다. 여수에 간 날, 평일이어서 그랬겠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웬만한 전시관은 2~3순번이면 들어갈 수 있었다. 한 프로그램이 15~20분이고, 한꺼번에 수백 명씩 입장하니 줄은 길어도 엑스포치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도 언제든 볼 수 있는 영구시설인 아쿠아리움의 줄은 더 길었다. 기다리는 곳도 천장이나 그늘막이 있고 바닷바람도 시원해 땡볕에서 기다렸던 다른 외국 엑스포보다 나았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던 어르신은 직원을 향해 “언제 들어가느냐”며 무섭게 화를 냈다. 엑스포 관계자가 말했다. “오래 기다린다는 불평이 인터넷에 올라온 후 10~20분만 기다려도 항의하는 관객이 많아요.” 심지어 학교·공공단체 등은 단체관람 문의를 하면서 자기들만 특별히 우선 관람하도록 해달라고 떼쓰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이번 여수 현장에서 본 문제점은 ‘엑스포’가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의 ‘민도(民度)’였다. 기다릴 때는 기다릴 줄 아는 게 선진국민이다. 엑스포는 우리의 문명과 비전을 대중에게 교육하고 계몽하는 행사다. 그리고 기다리는 행사다. 인류의 문명과 비전이란 무던한 기다림과 인내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