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대북 식량특사 파견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3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국민세금 8400억원을 떼일 판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무관심하다. 6월 중 받아야 할 돈이고, 말일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정부와 정치권 누구도 말이 없다. 마치 그냥 잊혀지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같다. 모두를 집단 건망증에 빠지게 한 건 2000년 9월 시작한 대북 식량차관 상환 문제다. 첫 남북 정상회담 석 달 뒤부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차관 공여 형태로 보낸 식량은 쌀 240만t과 옥수수 20만t. 북한 주민 모두에게 1인당 100㎏의 쌀을 준 셈인 엄청난 물량이다.

 국제사회에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북한에 차관을 주려 하자 당시 국민 비판이 만만치 않았다. 갚을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데 ‘10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었다. 정부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차피 식량차관 아이디어는 ‘대북 퍼주기’ 비판을 모면하려는 꼼수였기 때문이다. 묻지마식 대규모 식량지원은 ‘공짜가 아니라 국제관례에 따라 당당하게 빌려가는 것’이란 대국민 설득논리로 포장됐다. 대북지원 식량이 군부대나 장마당으로 흘러나갔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정부 당국자들은 “무상지원이면 몰라도 차관으로 준 건 북한이 어디에 쓰든 관여하기 어렵다”는 해괴한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세월은 화살같이 흘러 첫 상환분 583만 달러를 받아야 할 날이 지난 7일 닥쳤다. 채권추심의 악역을 떠맡은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전통을 띄웠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은 묵묵부답이다. 돌아온 건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핵심 당국자들은 무대 뒤편으로 자취를 감췄다. “걱정 마라. 북한은 틀림없이 갚을 것이다”라고 한 그들의 말은 공언(空言)이 됐다. 채무자는 아무 말 없는데 “북한 상황이 어려울 것이니 유예해 주거나 대체상환을 검토하자”는 섣부른 주장이 난무한다.

 천문학적 세금이 투입된 대북차관 문제를 이대로 어물쩍 넘겨서는 안 된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의 당국자들이 국고 손실을 책임지고 막아야 한다. 이제라도 대북 식량특사를 파견하라. 전임 정부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의 핵심 브레인인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적임자다. “북한에 자본주의 국제관례를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차관 공여를 추진한 자신들의 말에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평양행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 두 사람이 김정은을 만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상환 약속 이행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게 체제 생존의 길”임을 설득해야 한다.

 지금 북한은 60년 만의 가뭄으로 최악의 식량난에 직면했다. 미국의 24만t 대북 영양지원 계획은 두 달 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로 백지장이 됐다. 중국은 찔끔찔끔 지원으로 북한을 길들이려 한다. 평양의 대남전략가들이 식량확보만큼은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기대도 좋다. 남북관계 경색을 뚫고 차관상환에 발목 잡힌 대북 식량지원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식량특사를 서둘러야 한다.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