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무원 특채 폐지, 계급정년 연장 …‘별’ 달기가 별 따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6호 04면

국방부가 지난 4월 25일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개최한 ‘전역 예정 간부 취업 박람회’에 장교ㆍ부사관이 대거 참여했다. [연합뉴스]

박준기(53) 중령은 올해 임관 30년이다. 1978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입학한 뒤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켰다. 하지만 6월 30일 전역하는 그의 마음엔 당황과 당혹감이 가득하다. 전역 후 갈 곳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관 30년 맞은 ‘낀 세대’ 육사 38기

박 중령은 사관학교 입교 당시의 기쁨과 포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교생 때 바라보는 사관생도의 제복과 이미지는 멋지고 신선했다. 재수를 해서라도 육사에 가고 싶었다. 마침내 합격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6·25 참전 용사인 아버지는 대위로 전역했다.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30년 군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족들의 희생도 따랐다.

“군의 특성상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왔다 두 시간 만에 출근하는 날이 며칠씩 계속되기도 했다. 관사 내에 있다가 상황이 생기면 5~10분 내에 부대로 복귀해야 해서 자기 생활이란 게 거의 없었다. 17차례 이사했고, 아이들이 잦은 전학으로 힘들어했지만 군인의 숙명이라 생각하고 견뎠다. 안보란 공기와 같은 것 아닌가. 있을 땐 모르지만 없을 땐 질식해 죽는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항상 희생하는 자세로 살았다.”
하지만 전역을 앞둔 지금, 그의 진로는 불투명하다.

“고된 업무와 일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준비란 사치였다. 그래도 나는 정보 분야에서 계속 일하며 전문성을 살렸다고 나름대로 자부했다. 미국에서 3년간 근무해 영어도 자신 있다. 1년 전만 해도 안보 관련 기관의 연구원이나 교수·강사가 목표였지만 막상 전역을 앞둔 현실에선 그 자리를 얻는 게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알게 됐다. 비상계획관 자리도 나이 든 장교들에겐 차례가 오지 않는다. 지금 심정은 무조건 제일 먼저 취직되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군에 있을 때는 지휘관·참모 하면서 자부심에 넘치던 친구들이 빌딩 관리소장,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도 닥치면 뭐든 하려고 한다.”

박 중령 동기인 육사 38기는 1978년 입교해 82년 임관했다. 377명의 생도 선발에 경쟁률이 137대 1이었다. 어려운 관문을 뚫은 만큼 생도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동기애도 남달랐다. 2007년 장군을 배출하기 시작한 뒤 지금까지 수십 명의 ‘별’을 배출했다. 군 수뇌부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지만 대령 이상으로 진급하지 못한 절반 정도의 장교들은 지난해부터 내년 초까지 옷을 벗는다.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한 경우는 소수다. 내년 초 전역을 앞둔 A(52) 중령은 “지금까지 전역한 동기 중 비상계획관이나 방위산업체에 취직한 소수를 뺀 70% 정도가 마땅한 직업이 없거나 임시직·계약직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육사 38기가 사관학교에 입교할 당시의 기록적인 경쟁률엔 이유가 있다. 당시 모집요강엔 ‘5년 근무 후 3급을(현 5급) 채용 보장’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유신 사무관이다. 76년 도입된 이 제도에 따라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위까지 복무한 사람 중 일부는 공무원으로 특채됐다. 76년부터 제도가 없어진 87년까지 사관학교 출신으로 공무원이 된 사람은 784명에 달한다. 매년 70~80명이 혜택을 봤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88년 이 제도를 폐지했다. 그 혜택을 못 받게 된 첫 기수가 육사 38기다. 자연히 이들은 1년 선배보다 한층 더 치열한 승진 경쟁을 벌여야 했다. 누적된 인사 적체로 피해를 봤다는 뜻에서 육사 38기 이후는 ‘좌절의 세대’로 불린다. 38기로 현역인 B대령은 “엘리트 군인이란 자부심 때문에 유신 사무관을 바라고 육사에 들어왔다고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면서도 “입학 당시 재수·삼수생 비율이 동기생의 절반을 넘고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것은 이 제도와 관련 있다”고 말했다.

89년과 93년엔 또 다른 좌절을 맛봐야 했다. 군 인사법 개정 여파로 계급 정년이 연장돼 진급에서 누락한 뒤에도 군에 남는 선배 기수들이 크게 늘었다. 당시 ‘대포중(대령 진급을 포기한 중령)’ ‘장포대(장군 진급을 포기한 대령)’ 등의 유행어가 만들어졌다. 진급이 안 된 선배 기수들이 늘면서 인사 적체가 한층 심각해졌다. 그 피해는 38기 이하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전체 동기 중 대령·장성 진급 비율이 이때부터 선배 기수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대규모 전역이 이뤄지고 있는 요즘은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구조적인 실업난의 피해를 보고 있다. 대졸 취업난 등 젊은 층의 실업 해결이 급선무인 요즘, 아무리 전문적인 식견을 갖췄어도 연금이 나오는 50대의 취업난이 사회적 관심을 끌기는 쉽지 않아서다.

육사 38기로 2010년 6월 중령으로 예편한 뒤 현재 홍익대 외래교수로 있는 장순휘(53)씨. 한국국방문화혁신포럼 대표를 맡고 있는 장 교수는 최근 네 번째 시집(『우리가 걸었던 길』·항산)을 펴낸 시인이다.

장 교수는 “군인은 국가에 봉사하는 자리지만 한편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가는 직업이기도 한 것 아니냐”며 “전역 단계에서 제대로 된 전직 지원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 바람에 전문성 있는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존재 의의를 잃고 삶의 현장에 내던져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전역을 앞두고 내 돈으로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치는 등 오랜 준비를 거치고 나서야 자리를 잡았다”며 “장교 출신들의 주특기에 맞춰 전문성을 살리고, 사회의 수요와 연결해 주는 맞춤형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