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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절규, 입센의 유령...거장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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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10면

노르웨이 왕궁과 오슬로 전경 @Nancy Bundt / www.visitnorway.com

뭉크의 그림 속 오슬로의 중심 번화가 칼 요한스(Karl Johans) 거리는 좀 섬뜩한 모습이다. 저녁의 군청색 하늘 아래, 건물 창들에 비치는 창백하고 노르스름한 조명이 거리에 묘한 빛을 드리운다. 그림 정면을 향해 밀려오는 군중의 얼굴들도 같은 색을 띠며 유령 같은 광채를 낸다. 둥그렇게 뜬 그들의 눈은 텅 비어 있다.

인간의 삶과 밀착된 예술 도시, 오슬로

1 ‘칼 요한스의 저녁’(1892), 에드바르 뭉크 작 2 오슬로 최대 번화가 칼 요한스 거리.왼쪽은 그랜드카페, 오른쪽은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노르웨이 의회 건물 3 칼 요한스 거리에서 가까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뭉크 전시실로 유명하다. 4 ‘그랜드카페의 입센’(1908), 에드바르 뭉크 작 5 입센박물관, 헨리크 입센이 말년을 보낸 아파트를 개조했다.6 입센의 서재. 창가 책상 왼쪽 벽에는 그의 아들의 작은 초상화가,책상 오른쪽에는 훈장을 건 입센 자신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림과 다른 분위기, 칼 요한스 거리
실제는 어떨까. 오슬로 중앙역(Oslo S)에서부터 노르웨이 왕궁(Slottet)을 향해 서쪽으로 쭉 이어지는 칼 요한스 거리를 걸으며 받은 인상은 뭉크의 ‘칼 요한스의 저녁’(1892)과 사뭇 달랐다. 저녁의 조명은 여느 대도시보다 절제돼 있어 그림에서처럼 환각적이고 불안한 느낌이 아니다. 사람이 밀려다닐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어서 번화가치고는 조용하고 한가롭다. 그림 속 장소는 그림 오른쪽에 나오는 황갈색의 우아한 노르웨이 의회 건물인 그랜드호텔(Grand Hotel)과 길 건너 대각선으로 마주하는 곳이다. 고풍스러운 시계탑이 있는 140년 역사의 그랜드호텔은 매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머무르고 수상 축하 연회가 열리는 곳이다. 대낮의 이 거리는 저녁 때보다 더 붐비지만, 뭉크의 그림 속 대도시 인파의 공허한 분주함을 느끼기에는 한결 소박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사람들의 표정도 여유롭다.뭉크가 표현주의(Expressionism) 미술의 선구자임을 감안하면 이 차이는 이상하지 않다. ‘칼 요한스의 저녁’이나 ‘절규’ 속 배경은 객관적 풍경이 아니라 그의 감정이 재창조한 것이다. 그의 막연한 공포와 소외감에 따라 색채는 섬뜩한 빛을 띠고 형태는 뒤틀렸다. 그리고 이것이 뭉크만의 이상심리가 아니라 대다수 현대인의 내면에 잠재하는 심리이기에, 그리고 사회복지와 톨레랑스 정신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인조차 예외는 아니기에, 지금 이 그림들이 그의 고국과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것이리라.

7 창가 책상에서 작품을 쓰고 있는 헨리크 입센 8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 걸작 ‘절규(비명).’ 네 가지 회화 버전 중 가장 유명한 국립미술관 소장 버전이다.9다리 위의 소녀들’(1901), 에드바르 뭉크 작, 밤이라 달이 떠 있지만 하늘이 희뿌옇게 밝다.여름의 노르웨이 특유의 백야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입센이 사람 관찰하며 신문 읽던 그랜드 카페
뭉크가 칼 요한스 거리를 거닐며 인간 보편의 불안과 소외감을 더듬던 그때, 세계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또 한 명의 노르웨이인이 그랜드호텔 1층 그랜드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인형의 집’(1879), ‘유령’(1881) 등으로 근대 사실주의 연극을 창시한 입센이다. 그는 무려 27년간 외국에서 살다가 1891년 고국으로 돌아와 오슬로에 정착한 후, 자신의 아파트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그랜드카페를 10년간 거의 매일 찾았다. 장중한 분위기의 목재로 꾸며진 카페 안에는 지금도 그가 늘 앉던 테이블이 보존돼 있고 그의 모자가 얹혀 있다.“입센은 매일 오전 9시에 서재에서 일을 시작해 11시 반이 되면 무조건 중단하고 그랜드카페로 향했어요. 거기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않고,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신문을 읽었죠. 특히 광고를 열심히 읽었답니다! 광고만큼 세상과 대중의 변화를 첨예하게 보여주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죠.” 입센박물관(Ibsenmuseet)의 컨설턴트 베르글료트 게이스트의 말이다.

뭉크는 이런 입센의 모습을 그의 생전과 사후에 여러 차례 그렸다. 그중 한 그림을 보면 입센은 칼 요한스 거리가 내다보이는 카페 창문을 배경으로 담배 연기에 휩싸인 채 신문을 들고 있다. 뭉크는 입센과 인연이 깊었다. 그는 이미 20대부터 입센의 희곡, 특히 ‘유령’을 읽으면서 영감을 받았다. 30대 초반에 가진 개인전에서 혹평을 받는 와중에 입센이 찾아오자 큰 용기를 얻었다. 나중에 입센이 세상을 떠난 1906년에 뭉크는 독일에서 상연된 ‘유령’의 컨셉아트를 맡아 여러 장의 그림을 남겼다. 입센은 오후 2시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파트가 바로 지금의 입센박물관이다.따라서 그랜드호텔에서 입센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입센의 귀갓길을 따라가는 것이 된다. 칼 요한스 거리를 따라 계속 왕궁 쪽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오슬로대학이, 왼쪽에 국립극장(Nationaltheatret)이 마주 보는 곳에 도달한다. 모두 그리스 신전 같은 파사드를 지닌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이다. 이 국립극장이 1899년 처음 열었을 때 개막작 3편 중 하나가 입센의 ‘민중의 적’(1882)이었다.

10 비겔란 조각공원의 백미인 모놀리스 테라스.가운데 모놀리스는 17m,270t에 달하는 화강암 덩어리로 남녀노소의 형상이 얽혀 있다.11 오슬로 오페라하우스.해안에 걸쳐진 빙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비스듬한 지붕을 걸어 올라가 옥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다.12 비겔란 조각공원의 모놀리스 테라스의 인간 군상.

국립극장을 지나면 곧바로 녹음이 우거진 왕궁의 정원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여기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왕궁 정원의 경계를 따라가면 맞은편에 입센박물관이 나타난다. 박물관은 입센의 자필과 사진, 소지품 등 각종 자료를 소개하는 전시실과 입센 가족이 10여 년간 살았던 아파트 방들로 구성돼 있다. 아파트의 인테리어는 입센과 부인 수산나가 실제 사용하던 가구들을 모아 살아있을 당시와 거의 가깝게 복원했다. 입센이 오슬로에 돌아와 이 집을 샀을 때는 이미 성공한 60대 작가였기 때문에 실내는 꽤 넓고 호화로웠다. 특히 붉은 벽의 거실과 푸른 벽의 만찬용 식당이 화려하다. 하지만 정작 손님을 초대한 만찬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게이스트는 말한다.

“입센은 나이 들어 은둔자적 삶을 살았어요. 손님은 보통 집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서재에서 만나고 10∼15분 정도 지나면 내쫓다시피 했죠. 그의 원래 별명은 특유의 헤어스타일과 구레나룻 때문에 ‘사자’였는데, 여기에다 비밀이 많다고 ‘스핑크스’라 불리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창문을 통해서라도 이 스타 작가를 보려고 했죠. 그가 서재에서 일하는 모습은 창문으로 쉽게 볼 수 있었고 그도 그건 굳이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문 너머 서재의 사자’는 관광 명물이 됐답니다.”
그 서재는 입센 아파트의 하이라이트다. 그가 일했던 창가 책상 왼쪽 벽에는 그가 자랑스럽게 여긴 외아들 시구르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서재 문가에는 놀랍게도 그의 한평생 라이벌이었던 스웨덴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초상화를 입센 자신이 구입했다는 것이다. 입센은 그를 자신의 ‘네메시스’(그리스 신화에서 오만에 대한 보복을 상징하는 여신)라고 부르며 “네메시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절규'의 가장 유명한 버전이 소장된 국립 미술관
이제 뭉크를 찾아갈 차례다. ‘그랜드카페의 입센’을 포함해 뭉크의 그림 1200여 점이 소장된 뭉크미술관(Munch-museet)은 칼 요한스 거리에서 동쪽으로 꽤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새 전시 준비로 1주일간 닫혀 있는 상태. 그래서 대신 노르웨이 국립미술관(Nasjonalgalleriet)의 뭉크 전시실로 향했다. 다시 오슬로 대학과 국립극장이 마주 보는 길로 들어가 대학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 한 블록 걸으면 바로 국립미술관이다.이곳 뭉크 전시실은 비록 그림 수에선 뭉크미술관을 따르지 못하지만, ‘사춘기’(1894~95), ‘마돈나’(1894∼95), ‘삶의 춤’(1899∼1900) 등 중요한 대표작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중 백미는 물론 1893년 작 ‘절규’다. 지난달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린 작품을 포함해 네 가지 버전의 ‘절규’ 중에서 이 국립미술관 소장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나머지 두 버전은 뭉크미술관에 있는데 그중 하나는 2004년에 도난당했다가 2006년에 회수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실물로 본 ‘절규’는 뭉크가 1892년 일기에 기록한 대로 “불타는 구름이 피와 칼과 같은 형태로 짙은 푸른색의 피오르와 도시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무심한 친구들과 달리 주인공은 “거대한, 무한한 비명이 자연을 꿰뚫는 것을” 홀로 느끼며, 자신의 몸 또한 관통하는 그 비명을 휘둥그레 뜬 눈과 찢어질 듯 벌린 입으로 토해낸다. 사실 이 그림의 제목으로는 ‘절규’보다 ‘비명’이 더 정확하다.

노르웨이어 원제는 ‘Skrik’. 영어로 ‘Scr-
eam’ 혹은 ‘Shriek’로 번역되는데, 아주 날카로운 비명 같은 외침, 우리말 의성어로 치자면 “끼야악” 같은 소리 지름이다.
또 눈에 띄는 것이 ‘병든 아이’(1885∼86)와 ‘병실에서의 죽음’(1893)이다. 이 그림들은 뭉크가 누나의 죽음에 대해 지닌 강박적 기억의 산물이다. 뭉크의 어머니와 누나는 모두 폐결핵으로 각각 그가 다섯 살일 때와 열네 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 쪽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뭉크는 자신의 가족을 괴롭힌 육체적·정신적 병력이 자신에게 유전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에 평생 시달렸다. 바로 그 때문에도 뭉크는 입센의 ‘유령’에 그토록 매혹됐던 것이다. ‘유령’의 주요 인물인 오스왈드는 뭉크처럼 화가인 데다 아버지의 방탕으로 인한 성병에 선천적으로 감염돼 파멸에 이른다.

그 밖에 주목할 만한 그림들로 ‘다리 위의 소녀들’(1901)과 ‘백야’(1901)를 가리키며 국립미술관의 상급 큐레이터 엘렌 레르베르그 가 말했다. “두 그림 다 배경이 밤인데 하늘이 완전히 어둡지 않고 푸르스름하거나 희뿌옇죠.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의 여름에 나타나는 백야를 그린 것입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화가들이 백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42개 전시실에는 이 밖에도 중세 성화부터 파블로 피카소 같은 20세기 화가들의 그림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노르웨이 디자인 철학이 숨쉬는 오페라하우스
이제 옛 대가들의 자취를 떠나 노르웨이의 동시대 예술, 2008년 개관한 오페라하우스를 보러 갈 시간이다. 중앙역 옆 항만에 있는 오슬로 오페라하우스까지는 20분 정도 걸어가도 되고, 국립극장역에서 중앙역까지 T-bane 지하철이나 트램(시가전차)을 타고 가도 된다. 중앙역에서 육교를 건너가면 마치 해안에 걸쳐진 거대한 빙하 같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건축회사 스뇌헤타가 디자인한 오페라하우스다. 이 오페라하우스는 거대한 유리창 부분 외에는 온통 빙하처럼 하얀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또 지붕이 완만한 사선으로 지상까지 닿는 형태라서 누구든 지붕 위를 걸어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공연을 보러 오지 않은 사람도 지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매력이다. “여름밤 물 위에 뜬 옥외 무대에 공연이 있는 날이면 이 지붕이 그대로 관객석이 되죠. 최대 7000명까지 지붕에 올라갈 수 있어요”라는 것이 오페라하우스 홍보담당인 레네 야콥센의 설명이다.

중앙 로비로 들어서면 가운데 공연장 부분을 감싼 벽이 따뜻한 느낌의 목재로 되어 있어서 외부의 차가운 대리석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특히 1364석 규모의 대극장 안은 이러한 목재와 오렌지색 좌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대개 진홍색과 금색으로 장려하게 장식된 유럽의 전통적인 오페라극장 내부와 무척 다르다. 아늑한 느낌을 주고,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이 실내는 바로 요즘 한국인들도 열광하는 북유럽 디자인의 한 단면이다.

한 조각가가 20년 뚝심의 결실, 비겔란 조각공원
마지막으로 노르웨이 예술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서쪽에 있는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sparken)이다.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1869~1943)의 20년 뚝심으로 만들어진 이 공원은 32만㎡에 달하고 200개가 넘는 청동과 화강암 조각들이 있는데, 모두 비겔란의 작품이다. 중앙역 앞에서 12번 트램을 타고 바로 공원 정문 앞에 있는 Vigelandsparken 정거장에서 내리면 된다.

정문 앞 넓은 잔디밭을 지나면 그림 같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고, 난간에 브론즈의 인간 군상이 자리 잡고 있다. 다리를 지나면 역시 청동 조각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수대가 나오고 그것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이 공원의 백미인 모놀리스가 나온다. 270t에 달하는 화강암 덩어리 하나로 만들어진 17m 높이의 모놀리스에는 서로 위로 올라가려는 듯 역동적으로 엉켜 있는 남녀노소가 조각돼 있다. 또한 그를 둘러싼 계단의 화강암 조각들은 인간의 어릴 때부터 노년기까지의 삶과 죽음, 다른 인간과의 관계, 거기에서 나오는 소통과 고독, 또 희로애락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한다. 그러면서 문득 조각의 시선과 눈을 맞추고 때로는 한참 바라본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 같은 아이들의 조각을 만지면서 웃는다. 인간의 삶과 밀착된 예술, 이것이 비겔란뿐 아니라 입센과 뭉크부터 오페라하우스의 건축가까지 오슬로의 예술가들이 알려주는 예술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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