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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싸움 승리 위해 기꺼이 허리 굽혔던 이순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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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왜군 함선 133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재연 행사가 지난해 10월 1일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 작은 사진은 포악하게 행동했으나 나중에 이순신의 진가를 알아봤던 명나라 원군 도독 진린의 실제 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중앙포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때 명분은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속셈은 조선을 정벌하고 명나라까지 점령해서 영파라는 곳에 본부를 두고 조선과 명, 일본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파죽지세의 공격 앞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조선은 명에 구원을 요청했다. 명에서도 급했다.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이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명에서 온 장수들은 하나같이 거만하고 방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동반도에서 수군 5000 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한 도독 진린은 난폭하기로 소문났다.
그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선의 관민들을 때리고 욕했다. 마치 짐승을 다루듯 했다. 진린은 강화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머물고 있는 고금도로 가지 않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들어와 임금으로부터 기어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598년 6월 26일 진린 일행은 선조를 비롯한 수많은 중신들로부터 송별인사를 받았다.
진린은 송별 자리에 조금 늦게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찰방(역참의 하급관리) 이상규의 목을 짐승처럼 새끼줄로 묶어 끌고 다니는 행패를 부렸다. 이상규의 얼굴은 피투성이로 변했고, 보는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굴렀다. 보다 못한 영의정 유성룡이 나서서 진린에게 선처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며 곧 그와 합류할 이순신을 걱정했다.

진린, 이순신 전사하자 공적 기리는 장계
유성룡뿐 아니라 다른 조정대신들도 근심이 태산 같았다. 진린의 비위를 거스른 조정 대신들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심지어 곤장까지 맞았던 터였다. 진린의 본대는 곧 고금도로 향했다. 이때가 1598년 7월 16일이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서 진린의 고약한 성격을 미리 안 이순신 장군은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다. 군사들을 풀어 산에서 사슴과 멧돼지를, 바다에서 온갖 물고기를 잡게 하고 많은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휘하 장교들과 함께 수십 리 길을 마중 나갔다. 진린을 보는 순간 “대제독, 어서 오십시오”라며 크게 허리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진영에 들어오자 미리 준비해놓은 음식으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명나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취하게 했다. 이틀 후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한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명나라 측의 전과는 없었다. 화가 난 진린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날뛰었는데 이때 이순신 장군이 넌지시 말했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모두 노야(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의 것입니다. 오늘의 수급을 모두 노야에게 드리겠으니 그것으로 첫 승전 보고를 귀국 황제에게 하면 매우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진린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손을 잡고 “중국에서부터 이미 장군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보니 장군에 대한 모든 칭찬이 거짓이 아니었구려!”하며 탄복했다. 원칙주의자, 강직한 인물의 대명사인 이순신이 왜 허리를 굽혔으며, 왜 수급을 양보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라를 위해서다. 진린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나라를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불과 4개월 후,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대첩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몰래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은 이들을 모조리 섬멸하기 위해 진린과 함께 조·명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노량으로 향했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 10시쯤이었다. 이순신은 진린의 배가 너무 작아서 그를 위해 특별히 조선의 튼튼하고 거대한 판옥선 두 척을 내주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의 조선함대 83척은 일본수군을 향해 맹렬히 화공을 벌였다. 이때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안전한 죽도 일대에서 사태를 지켜보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세가 조선 쪽으로 기울어지자 조선함대를 돕는답시고 뱃머리를 관음포 방향으로 돌렸다. 그런데 명나라 부장 등자룡이 탄 판옥선에 불이 붙었다. 겨울에 가까운 시기였고 새벽녘이었기에 몹시 추웠다. 그래서 갑판 위에 모닥불을 피웠다가 배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명나라 수졸들이 불을 피하기 위해 소란을 일으키며 한 곳으로 쏠리다가 배가 기울어졌다. 그 틈을 타서 일본 수군이 잽싸게 배에 올라타서 등자룡의 목을 베어버렸다. 등자룡이 죽자 일본 수군은 배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곧 그 옆에 있던 진린의 판옥선으로 뛰어들었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부상을 당하면서까지 몸을 날려 일본군과 함께 바다에 뛰어 내려 죽었다. 진린의 목숨도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것을 이순신이 봤다. 아무리 진린이 얄미운 짓만 골라서 했지만 이순신이 누구인가? 공(公)은 공(公)이고 사(私)는 사(私)다. 대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주저 않고 기함을 돌려 진린의 배로 갔다. 일본군의 지휘선에서는 진린의 배를 나포하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숙달된 명궁의 실력으로 급히 화살을 쏘았다. 일본 장수 한 명이 “꽥!”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바다에 뒹굴어 떨어졌다. 이를 본 일본 수군들이 황급히 지휘선을 보호하기 위해 포위망을 풀었다. 이때를 틈 타서 진린의 배는 무사히 빠져나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이순신은 이렇게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죽음의 포위망 속으로 뛰어 들어가 진린을 구한 것이다. 진린은 감복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일본군의 유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통곡했고, 그 후 명의 황제에게 장계를 올려 이순신의 공적을 기렸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이렇다. “폐하, 애통하여 붓을 들기가 어렵고 떨어지는 눈물로 먹을 갈아 올리나이다…(중략)…7년에 걸친 참담한 전란 중에 섬나라의 도적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떤 것은 오직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었으니…(중략) 다시금 북받치는 애통함에 붓을 들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일찍이 순신이 소장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소장은 죽음이 순신을 데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이다. 폐하, 소장을 용서하시옵소서.” 진심은 사람을 움직인다. 아무리 포악하고 이기적인 진린이었지만 이순신의 진정한 충정 앞에 무너졌다.

진정한 전략가는 경쟁과 승리 넘어서야
이순신과 같은 사람을 두고 손자병법 작전(作戰) 제2편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돌보는 자요,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주인공(民之司命 國家安危之主也)”이라고 한다. 이순신이 진린을 처음 만났을 때 허리를 굽혔던 행위는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 나오는 “나를 낮추어 상대방의 교만을 부추긴다(卑而驕之)”는 병법에 기인한다. 일반적인 세상의 이치는 겸손하면 흥하고 교만하면 망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망하게 하려면 그에게 교만심이 발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순히 진린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임으로써 보다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긴급한 전쟁의 와중에 명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진린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강직한 이순신이 허리를 굽혔던 것이다. 자존감은 지키되 자존심은 버렸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전략적 대범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순신은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진린은 조선의 장수 이순신에게 미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경쟁을 넘어섬으로써 경쟁에서 이겼다. 최고의 경쟁은 경쟁을 넘어서고, 최고의 승리는 승리를 넘어선다.

경쟁이나 승리는 단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경지를 잘 알아야 진정한 전략가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은 1595년 1월 1일자 난중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정직하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혼자 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가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이순신은 혼자 있을 때 나랏일을 생각했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날에는 맨가슴을 치며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위장된 의(義)를 내세워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일 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의 말을 증명했고 실천했다. 그렇기에 유한의 생명을 넘어 불멸이 되었다. 마음을 둘 곳 없고 나라가 흉흉할 때마다 이순신을 찾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세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자. 나는 살면서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허리를 굽혀 봤는가? 나는 혼자 있을 때 주로 무슨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가? 나는 단 한번이라도 나라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는가?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십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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