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족 단일당’ 신간회, 열 달 새 지회 100개로 勢 확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5호 26면

안동예안지구 신간회 지회 결성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사진가 권태균]

서울청년회의 비밀당 고려공산동맹과 화요회의 비밀당 조공은 표면적으로 민족주의 세력과의 민족협동전선, 즉 민족 단일당 결성에 나섰다.
먼저 시작한 것은 서울청년회여서 1926년 7월 조선물산장려회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발족했다. 조선민흥회는 “정치, 경제, 산업 등에서 조선민족의 공통의 이익을 목적으로··· 각 계급을 망라한 조선민족의 단일전선을 조직한다”(동아일보 1926년 7월 10일)고 선언했다. 조선민흥회는 발기 취지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민족주의자가 서로 제휴하여 공동전선을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혁명적 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란 일본의 지배하에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민족 개량주의자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⑫조선공산당의 해체

그러나 1926년 5월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이 병사하고, 1926년 9월 조공 책임비서가 된 상해파 출신의 김철수가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공 입당을 독려하면서 서울청년회와 화요회의 대립 구도는 약해졌다. 코민테른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을 승인하면서 내린 11개조 지령문에서 가장 먼저 ‘조선은 민족혁명 단일전선이 필요한데 노동자, 지식계급, 소부르주아, 일부 부르주아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시했기 때문에 조공도 민족 단일당 결성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공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신간회(新幹會) 결정을 추진하는데, 1927년 1월 19일 발표한 신간회 3개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함’이었다. ‘기회주의’란 물론 자치를 주장하는 민족 개량주의를 뜻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란 사설을 썼는데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의 식민 지배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최린(崔麟) 같은 민족 개량주의자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要史)는 이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 및 동경 유학 조선인 일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 (동아일보의: 괄호는 인용자의 설명) 일부 간부의 경질까지도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쓸 정도였다. 고등경찰요사는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화합하여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형성해서 각지에 성토문을 발송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고 전한다. 그 여파로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 신간회원 검거를 보도한 중외일보.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자 일제는 대검거로 맞섰다. 2 코민테른 대회 광경. 1928년 코민테른이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채택하면서 국내 좌우 합작운동도 위기를 맞았다.

이광수의 사설 ‘민족적 경륜’은 거꾸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결집시켰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가 공표되자 조선민흥회도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고 신간회와 합동을 서둘렀다. 신간회는 조선민흥회의 합동 조건을 모두 승인해서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명실상부한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회장은 민족주의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은 사회주의자 홍명희(洪命憙)였고, 각 부서도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반분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인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 돌파 기념식을 거행할 정도로 급격히 확장되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는 “본회(本會: 신간회)는 조선공산당의 지지가 있었고 각지 사상단체에서도 극력 지원했다”고 분석했다. 신간회의 배후에 조공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1928년 초 전국 지회 총수 143개, 회원 2만여 명에 달하게 되자 이에 놀란 일제는 1928년 2월의 신간회 정기대회를 금지시키는 한편 1928년 2월 2일부터 ML당에 대한 대검거에 나섰다. ML당은 김철수→안광천→김준연→김세연 책임비서로 이어지는 제3차 조공을 뜻하는 것이다. 제3차 조공은 1926년 9월부터 1928년 2월까지 1년5개월에 불과하지만 책임비서가 자주 교체된 것은 일경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대검거로 30여 명이 체포되면서 제3차 조공은 또 붕괴되었다.

그런데 대검거가 진행되는 와중인 1928년 2월 27일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阿峴里: 현 마포구 아현동) 537번지 김병환(金炳煥) 집에서 조공 제3차 당 대회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조공 당책을 통과시키고, 코민테른 결정서를 가결했다. 이는 이정윤이 1928년 1월 상해의 코민테른 기관에서 받아온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 결정서’였다.

코민테른은 이 문건을 통해 “조선의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임무는 완전한 당의 실현이며, 상존하는 모든 종파 및 그룹의 즉각적인 해체이다. 조선공산당은 편협하게도 지식계급과 학생의 결합체로 되어 있다··· 새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밖의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조공은 이 대회에서 29개 항에 달하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 보고할 국내 정세’란 논강(論綱)을 채택했다. “유럽과 미국 특히 일본 자본주의의 침입은 조선 재래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였다. 서양과 같은 근대적 대공업은 당초부터 발달하지 않았기에 조선에는 강대한 부르주아지도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대한 집단도 없다”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했다. 예컨대 조선 내 일본인 수는 전체 농민 수의 0.028%에 불과하지만 소유 토지는 56.6%라는 내용 등이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어진다.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혁명적이다. 그러나 직접혁명의 조건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시민적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투쟁은 노동대중의 민주적 집권자를 갖는 인민공화국을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민족해방운동은 이른바 자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또한 사업 보고에서는 “홍명희를 수반으로, 권태석·송내호(宋乃浩) 두 사람을 보조자로 신간회 안에 프락치를 설치하고 신간회로 하여금 당 정책을 구현하도록 노력 중”이라고 말해서 신간회를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검거된 간부 대신 새로운 중앙위원을 선임할 전형위원으로 정백(鄭栢)·이정윤(李廷允)·이경호(李慶浩)를 선임했는데, 정백과 이정윤은 모두 서울청년회 계열이었다.

그런데 당 대회가 끝난 28일 당일 정백·이정윤 두 전형위원이 종로서에 체포되었을 만큼 일제 수사망은 바싹 좁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위원은 3월 10일 석방되는 윤택근(尹澤根)에게 새 중앙위원 명단을 주어 전형위원 이경호에게 건네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안광천, 차금봉(車今奉), 김한경, 한명찬, 김재명, 이성태, 양명, 한해, 윤택근 등이 새 간부로 선임됐다. 책임비서는 차금봉이었다.

차금봉은 용산 기관차화부 견습공 출신으로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선노동공제회를 주도했고, 또 1923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정재달(鄭在達)을 동소문 근방의 산중에서 구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는 코민테른 결정서가 영향을 미쳐서 최초로 노동자 출신 책임비서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 6월 중순 이성태가 체포되자 당 조직이 드러난 것으로 판단한 간부들은 6월 20일 공덕리(孔德里: 현 마포구 공덕동) 뒷산에서 회합해 일시 해산을 결정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다. 아니나 다를까 1928년 7월 5일부터 다시 대검거가 시작돼 10월 5일까지 모두 175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중앙위원 한명찬의 압수품 중에서 유독 사상 색채가 없는 ‘재계연구’(財界硏究: 1928년 4월 발행)란 잡지와 명반(明礬)을 발견하고 불에 쪼여 검사한 결과 명반으로 쓴 조공 세칙 및 정치 논강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143명이 검사국에 송치되면서 노동자 출신이 책임비서였던 제4차 조공도 붕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의 공산당원은 대부분 지식계급 및 학생”이라면서 조공의 승인을 취소하고 재조직을 요구하는 이른바 ‘12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간회도 새 중앙집행위원장 김병로(金炳魯) 집행부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은 지회들의 반발이 잇따르다가 1931년 5월 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해소 요구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는 1928년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극좌 정책에 따라 코민테른이 계급 대(對) 계급 전술로 전환하면서 국내 좌우 합작운동 지속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한국인의 시각이 아니라 코민테른의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봐야 했던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의 한계였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끝. 다음 호부터는 ‘아나키즘이 도래하다’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