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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 없애고 국민주권 회복 … 5년 단임의 ‘대통령 무책임제’ 폐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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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호 10면

7일 오후 각 분야 학자들이 6·10 항쟁 산물인 ‘87년 체제’의 공과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상연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박명림 연세대 교수, 성낙인 서울대 교수, 김형기 경북대 교수, 정용덕 한국사회과학협의회장, 박수정 행정개혁시민연합 기획처장. 조용철 기자

최상연 정치에디터=6·10 민주항쟁이 10일로 25주년을 맞았다. 6·10 항쟁으로 만들어진 87년 체제는 정치권력의 배분이란 측면에서, 또 정책의 실질적 측면에서 지난 25년간 어떤 발전을 가져왔나. 먼저 87년 체제의 의미를 짚어 보는 게 좋겠다. 이후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따져 보자.

연중 기획 한국사회 대논쟁 ⑪ 6·10항쟁 산물 ‘87년 체제’의 공과

박명림(연세대) 교수=6월 항쟁은 우리 역사의 작동 방식을 바꿔 놓았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그 이전의 동학 농민운동, 3·1운동, 4월 혁명, 광주 항쟁 등은 밑으로부터의 저항과 위로부터의 기존 질서 복원이 반복된 형태였다. 하지만 6월 항쟁은 한국 정치에서 군부를 항구적으로 퇴출시켜 민주화로 이행됐다. 근·현대사 전체의 분수령이다. 다른 제3세계 국가와 비교할 때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6월 항쟁은 군부 독재를 타도한 게 아니다. 군부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잠정 타협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은 상당히 강력하게 남았고 민주화 세력은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보수와 진보의 불안정한 공존, 불안정한 타협 체제란 측면에서 한국형 체제다.

성낙인(서울대) 교수=48년 헌법 제정 이후 대표적인 국민의 저항권 발동은 4월 학생혁명과 6월 항쟁이다. 4월 학생혁명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6월 항쟁은 성공했다. 큰 의미가 있지만 87년 헌법에서 비롯된 87년 체제는 헌법상 문제가 있다. 민주 헌법이라고 하지만 가장 경솔하게 만든 헌법이다. 여야 8인 정치회담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당시 유력 대선 후보들은 헌법 조문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예컨대 3공화국 땐 위헌법률심판권이 대법원에 있었다. 3공화국 10년간 대법원이 위헌 판결한 것은 단 한 건 있는데, 국가배상법 2조 1항 단서와 관련된 군인·공무원에 대한 이중배상금지 조항이다. 71년에 위헌 결정했다. 그런데 72년 유신으로 국가배상법 2조에 있던 그 조항이 그대로 헌법에 들어갔다. 5공 헌법으로 이어지더니 현행 헌법에도 그대로 있다. 우리 헌정사엔 대통령 후보의 유고와 관련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아무런 헌법 규정이 없다. 6월 항쟁으로 우리가 직선 만능 사회가 된 측면도 있다.

김형기(경북대) 교수=경제적 측면에서 87년 체제는 선진국과 같은 성장 체제 혹은 자본 축적 체제가 성립된 과정이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제1의 대전환이 있었다. 87년은 개발독재 체제에서 민주 체제로 이행되고, 노사관계가 과거의 사용자 일방적 관계에서 민주적 관계로 바뀌었다. 노동조합의 단체교섭력은 강화되고 임금은 상승했다. 이 무렵인 85년부터 현대자동차는 대량 생산체제에 들어간다. 컨베이어 시스템이 도입돼 대량 생산이 일어나자 고생산성이 고임금으로 연결됐다. 고임금은 대량소비를 불렀다. 임금이 상승하고 내수가 확대되면서 대량 소비는 다시 대량 생산을 가져오는 거시경제적 호순환이 형성된다. 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이 체제는 해체되고 신자유주의와 결합돼 양극화가 심화됐다. 하지만 어쨌든 87년부터 외환위기까지 한국 자본주의는 황금기였다. 선진국은 45년부터 30년간을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우리는 10년간이었다.

박수정(행정개혁시민연합) 기획처장=6월 항쟁 후 다양한 시민단체가 등장했다. 시민사회는 여기서 연원을 갖는다. 경실련이 나왔고, 우리 단체도 그때 생겼다. 6·10 항쟁을 계기로 현실적으로 자각한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한 구조적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런 단체들은 정치와 행정의 민주화, 효율성과 부패 감소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됐다. 그 이전엔 이런 문제를 권력자 스스로의 자제에서 기대했다.

정용덕(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이전에 비해 확실하게 민주화됐다. 그런데 왜 양극화가 심화되고 국민들은 삶의 질이 낮아진다고 느끼고 있을까. 유권자는 자신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았다. 그런데 지도자는 어째서 국민의 뜻을 정책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나.

박명림 교수=87년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탈군사화, 문민화다. 나는 포괄적으로 87년 체제란 용어를 쓰는 데 대해 비판적이다. 헌정 구조, 정당 체제에 사용할 순 있지만 87년 체제를 경제·노동·교육 체제 등의 분야로 확대할 수 있을 만큼 87년 이전과 이후에 완전한 변화가 있는지 의문이다. 정치권력 측면에선 대통령 5년 단임제와 지역정당 체제가 이뤄졌다. 5년 단임의 권력구조는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모든 집권 세력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에 직면했고, 모든 대통령이 재임 중 탈당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무정당 통치가 반복됐다. 더 큰 문제는 단순 다수 대표제와 연결되는 양대 정당 제도다. 우리는 단순 다수 대표제를 선택했는데도 유효 정당 숫자가 87년 체제에서 3개를 넘어서 3.17이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항상 양당 대결 같지만 실제론 또 하나의 교섭단체가 반드시 만들어졌다. 헌법을 양당제에 근거해 만들었지만 실제 정당은 지역 정당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모든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으로 출발해서 식물 대통령으로 끝났다.

김형기 교수=경제적으로 87년 이전과 이후에 확실한 변화가 있다. 87년 이전엔 노동 생산성보다 임금이 훨씬 낮았다. 87년부터 역전됐다. 그런데 97년에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재역전된다. 드라마틱한 변화다. 한국 자본주의는 87년이 1대 전환이고 97년은 2대 전환이다. 문제는 87년 체제가 민주 체제지만 87년 이후 25년간 재벌체제와 수도권 집중이 더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중앙집권 체제와 재벌집중 체제를 해소해야 하는데 단서는 헌법 전문과 119조 2항이다. 87년 개헌 때 헌법 119조 2항에 경제 민주화 조항이 들어갔다. 119조 1항은 경제적 자유주의고 2항은 경제 민주주의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 결과를 계기로 2항이 1항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재계에선 2항을 폐기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연말 대선을 계기로 중앙집권 체제, 재벌 체제,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시대적 담론이 모아져야 한다.

성낙인 교수=헌법 119조가 만들어진 시대적 상황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를 빼고 헌법에 경제에 관한 ‘장(章)’을 두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48년엔 나라를 경제적으로 잘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 국가통제경제 체제의 헌법을 만든 것이다. 당시 헌법에선 무역도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후 9번의 헌법 개정을 통해 자유시장 경제 쪽으로 진일보했다. 예컨대 1980년대 헌법은 소작제 금지 조항을 그대로 두면서 2항에 농지위탁경영을 허용했다. 87년 헌법의 경제 민주화 조항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119조 1항과 2항이 원래부터 그대로 있다. 1항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2항은 국가가 일정한 규제와 조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제헌 헌법에서부터 5공화국까지는 사회정의란 표현을 썼다. 87년 헌법에서 사회정의란 말이 경제 민주화로 바뀐 것이다. 똑같은 말인데 그때 민주화가 화두니까 경제 민주화로 한 것이다. 시장경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벌과 양극화 문제를 보면 된다.

박명림 교수=87년 헌법은 48년 건국 헌법보다 62년 박정희 헌법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건국 헌법은 사회적 시장경제국가, 일종의 국가사회주의 헌법이다. 하지만 54년 헌법 때 국유화 조항을 전부 시장경제로 바꾸도록 미국이 강력하게 압박했다. 그래도 ‘대한민국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 발전을 기본으로 삼는다. 개인의 경제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62년 헌법 때 역전된다. 당시 2항이었던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규정이 앞으로 나온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은 뒤로 밀린다. 사회 국가가 시장 국가로 바뀐 것이다. 사회정의와 균형 있는 국민경제 발전으로부터 개인의 창의와 자유의 보장으로 바뀐 게 62년 헌법이다. 87년 헌법의 119조 2항은 이것보다도 후퇴했다. 의회나 대통령이 재벌이나 우리나라의 기업국가화에 대해 어떤 조정과 균형의 역할을 못하는 점에 대해선 깊은 논쟁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성낙인 교수=48년 국민소득 50달러, 100달러도 안 되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될 수 있었겠나.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3분의 1이 사회주의 하자고 했다. 미국의 겁박에 의해 54년 시장경제가 들어왔다고 말하지만 설사 그렇다 쳐도 나라는 국가 사회주의 상황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론 자본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62년 헌법에서 그렇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장경제가 기본이다. 다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항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매우 정상적이다.

박수정 기획처장=주로 경제 헌법 문제를 말씀하시는데 민주주의 생명은 어쨌든 권력 분립과 권력 간의 경쟁이다. 탈권위주의나 시민사회 활성화에 기반해 정부의 조직이나 기능이 운영되도록 재조율돼야 한다. 87년을 계기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권력 분립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논의도 본격화된 게 아니다.

정용덕 회장=헌법이 모든 걸 다 규정할 순 없는 일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도 기본은 자유주의다. 그러나 거기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은 건져줘야 한다는 게 차등의 원칙이다. 헌법 119조에 담긴 뜻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1항과 2항의 순서가 정해진 87년 헌법은 미국식 자유주의와 미국식 진보주의가 다 들어가 있다. 1항과 2항 중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는지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과 선거를 통해 결정해 나가면 된다. 굳이 헌법에서 1항과 2항을 바꾸느냐 혹은 없애느냐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명림 교수=87년 체제란 게 이중적이다. 국가의 급속한 발전을 초래했지만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참여의 국민주권은 돌려줬다. 그러나 자유의 혜택은 과두화, 집중화로 나타났다. 우리는 지금 중앙집권적 민주체제가 아니라 중앙패권적 체제라고 할 만하다. 은행은 20개에서 4개로, 병원은 서울의 4개 병원으로 집중됐다. 기업, 언론, 대학, 유통 등 모든 분야서 87년 이후 최상의 3, 4개가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는 제도 밖 갈등을 제도 안으로 수렴해 갈등 정도를 낮추는 거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갈등은 갈등대로 존재하고 점점 진영화, 양극화된다. 경제가 발전하지만 자살률 1등 등 인간 실존은 꼴찌다. 민주주의 효과가 과연 일반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겠나. 그래서 87년 체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필요한 거다. 지방균형, 자치균형 국가가 되지 않으면 성장도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김형기 교수=재벌 체제란 게 지속적으로 강화됐지만 97년 이후 더욱더 강화돼 양극화가 심해졌다. 97년 이후엔 상층에서의 성장 과실이 밑바닥으로 가는 것도 깨졌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이윤은 결국 주주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배당금이 해외로 빠져나간다. 글로벌화와 연관이 있다. 성장해도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말인데 이런 상황에서 형식적 자유민주주의는 무력하다. 헌법 119조 2항이 정치 영역에서 구현돼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치 과정에서 반영거나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지역정당화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장은 커졌지만 정치는 축소됐다. 정치의 복원이 중요한데,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게 출발점이다.

성낙인 교수=정치인 인력 충원을 보면 과거보다 퇴보한 측면이 있다.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정당 문제 때문이다. 또 기업이든 정치든 윤리성이 담보되지 못한 현실 문제도 크다. 지금 우리 기업은 세계 100대 기업 반열에 올랐다. 전 세계의 공항에 내리면 삼성·LG·현대의 광고를 볼 수 있다.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이 됐는데 기업을 장악한 대주주 그룹이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마인드는 50, 60년대 수준을 못 벗어났다고 본다. 새로운 윤리를 심지 않는다면 한계가 있다.

박수정 기획처장=87년 이후 시민사회가 활성화됐다곤 하지만 여전히 관 주도의 문제점이 있다. 시민사회의 많은 재원이 정부 지원금에 의존한다. 특히 최근엔 민·관협력을 제대로 했던 지난 몇 년 동안의 역사마저 붕괴되는 느낌이다. 이런 상태라면 시민사회의 역량이 강화되기보다 신뢰의 문제가 생긴다. 정파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대통령이 탄생될 수 있는 구조, 정부와 시민사회가 권력을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는 구조로 헌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최상연 정치 에디터=87년 체제란 한마디로 압축하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다. 이를 통해 민주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임기 말 신뢰 위기를 겪었다. 또 5년 대통령과 4년 국회의원 간에 임기의 엇박자 문제를 들어 개헌하자는 목소리도 크다.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어떻게 보나. 대안이 있다면 뭘까.

박명림 교수=장기집권의 폐해를 확실하게 종식시킨 게 5년 단임제의 큰 업적이다. 문제는 5년 단임 대통령과 지역정당 체제가 계속 충돌해 불안정성이 높다는 거다. 현재 우리의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대통령 책임제가 아니라 대통령 무책임제다. 정당 책임제가 아니라 정당 무책임제다. 그래서 책임을 높이도록 바꿔야 한다. 여러 나라를 비교 연구해 보면 선거 주기에 맞춰 권력 구조를 바꾸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4년 중임제로 한다면 의회 임기와 맞춰 공동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여야, 영남과 호남, 중앙과 지방 등의 구조적 갈등의 균열 축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도 찾아야 한다.

성낙인 교수=5년 단임제는 대히트작이다. 대통령이 착착 바뀌어 나갔다. 5년이 짧은 기간도 아니다. 미국 역사에서 개인 기준으로 보면 대통령 재임기간이 5년 남짓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5년 단임제를 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적 과도기 현상이다. 긍정적 기여가 있지만 언젠가 헌법 개정이 있게 되면 5년 단임제를 계속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다. 대안이라면 4년 중임제다. 국민들이 의원내각제보다 대통령 직선제를 원하고 국회의원 4년 임기와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 그렇게 간다면 대통령은 전봇대 뽑는 면장일 그만하고 큰 정치를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정치가 복원된다. 일상적 내정이나 경제는 총리에게 맡기는 분권형이다. 문제는 개헌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우리는 87년까지 9번 개정했다. 이후 25년간 헌법 개정을 못했다. 일본이 46년 맥아더 헌법을 66년간 토씨 하나 못 바꿔 헌법 불임국가가 됐는데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영토 조항부터 자유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밝히는 한국 사회 대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단 이번 대선에선 헌법 개정 문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그에 대한 후보들의 비전을 듣는 게 좋겠다.

김형기 교수=5년 단임제가 한국 사회에 상당히 부정적 효과를 미치고 있다곤 보지 않는다. 어차피 중앙집권 체제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대대적 분권 문제다. 재정의 70% 이상이 수도권에서 걷히므로 재정 조정제도가 헌법에 규정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재정이 파탄난다.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자치단체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육아·양로· 보육·의료 등 모든 게 그렇다. 현재 복지 사무는 지방에 넘겨 놓고 재정은 주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2003년 프랑스 헌법처럼 지방분권을 단일화 이슈로 헌법에 담는 원포인트 개헌이 필요하다. 그래야 헌법 119조 2항이 정책적으로 실현된다. 지속가능한 관점에서 87년 체제를 전환시키는 새로운 국가모델이다.

박수정 기획처장=저희 단체는 2000년부터 4년 중임제 논의를 시작했다. 이와 함께 대통령의 당파적 권력을 막기 위해 검찰·국세청·방통위 등에 중립적 인사를 보장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2013년 체제는 복지와 형평이 강조되고 권력 분립이 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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