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오만원 남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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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야? 정말 5만원을 했단 말이야? 어휴,어어휴…."

기막힘과 서운함은 안 그래도 작은 나의 눈을 가자미 눈으로 만들어 버렸다.

"부조란 그때그때 형편에 맞게 하는 거지 뭘. 왜 그리 언성을 높이고 난리야."

"뭐라고? 그래도 명색이 언니인데 더는 못할망정 받은 만큼은 해야 할 것 아냐."

나는 목소리가 떨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작은딸과 막내 동생의 아들이 한 달 걸러 돌잔치를 치르게 돼 벌어진 일이다. 우리보다 넉넉하지 못한 막내도 우리 딸 잔치에 10만원을 부조했는데 남편이 처제 아들 잔치에 축의금 5만원을 낸 것이다. 외국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합리적이고 검소함이 조금 과해 시댁에서조차 이른바 '자반'이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남편이었다. 다음날 영락없이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오~만원 형부 뭐하셔? 내가 벌써 소문 다 내버렸지롱, 호호…."

겸연쩍음과 미안함을 푸념과 버무려 동생에게 풀어놓은 뒤 난 침묵 시위에 돌입했다.

"오~만원 아빠 저녁 드시라고 해라."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냉전은 계속됐다. 잠자리에 들기 전 거실에 앉아 빨래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리는 남편 목소리. 고개를 드니 베란다 창문 뒤에서 남편이 고개만 빠끔 내밀고 "까꿍"하며 징그러운 애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네 살 연하 남편의 이런 돌출 행동에 나는 또 픽 웃음으로 시위를 끝내고 말았다. 구멍 난 바지도 멋이라며 개의치 않는 알뜰함, 어린 두 아이와의 외출이 힘들다며 자동차는 내게 양보하고 전철로 출퇴근하는 사려깊음, 큰 손 아내를 두고도 변두리지만 집 장만도 할 수 있었던 철저한 계획성…. 책을 읽어준다고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는 남편, 제법 나온 배 아래로 간신히 걸쳐진 바지… 어느새 중년이 돼 가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서 마음 한구석이 뭉클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래, 당신은 우주보다도 더 넓고 귀한 우리 아이들의 아빠고 나의 남편이야!'

그때, 남편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깬다.

"야, 그래도 어제 잔치 끝나고 형님 댁에 갈 때 케이크 값 2만원은 내가 냈다."

'흐윽, 에잇! 우주 취소다. 애들 방에 있는 지구본이다, 흥!'

신은숙(38.주부.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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