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1998년의 상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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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논설위원

근로자 평균연봉 약 7000만원, 연 평균 연봉인상률 5% 이상, 지난해 순익 8조원인 회사. 바로 현대자동차다. 그런데 지난주 들렀던 현대차 울산공장은 임금협상 때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난 3년간 무분규를 기록했지만 올핸 장담할 수 없단다. 임협이지만 사내하청 문제나 주간 2교대 등 굵직한 현안들이 걸려 있는 데다 올 노조 집행부는 현 통합진보당처럼 NL과 PD계열이 연합한 강성노조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근로자들에겐 꿈같은 조건의 회사에서 도대체 파업을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사측과 노측에 물었다.

 사측이 대답했다.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총시간(HPV)을 보면 미국 앨라배마 공장 14.6시간, 중국 베이징 공장 19.5시간인데 국내 공장은 31.3시간이다. 국내 공장 생산성이 확 떨어진다. 심야노동 철폐를 위해 도입하려는 주간연속 2교대 근무의 경우 우리는 단축된 시간만큼 생산성 향상을 요구하지만 노조 측은 고용을 늘리라고 한다. 올 1월 기준, 근로자 평균 월급은 600만원이었다. 분규가 없던 4개년 동안 우리사주도 30~40주씩 주며 보상했다. 한데 올해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라고 한다. 8조원대의 순이익이 났으니 2조4000억원대를 달라는 것이다.

 노측은 말했다.

 국내 생산성? 2008년 조합원 4만4000명이던 당시 연간 167만 대를 생산해 순익 1조4000억원을 냈다. 그런데 지난해, 조합원 4만3950명일 때 189만 대 생산에 순익 8조1000억원을 달성했다. 이게 생산성이 떨어진 결과인가? 23년차 근로자 기본급이 190여만원이다. 각종 수당과 성과급 등을 맞춰야 월 평균 600만원쯤 된다. OECD 평균 근로시간은 연 1700시간쯤인데 우리 회사는 2800시간이 넘는 사람이 6000~7000명이다. 임금이 시급구조라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더 일한다.

 순익의 30% 성과급제는 1999년 노사 간에 합의된 내용이다. 당시 순익 배분을 주주:노동자:재투자 비율을 3:3:4로 하자고 했었다. 지난해 순익규모가 커지면서 사측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 노동시간은 너무 길다. 근로자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려면 생산라인을 증설하고 고용창출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양측은 이렇게 평행선을 달렸지만, 제3자 입장에서 들어보니 양쪽 입장 모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현대차 근로자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지난 몇 년간 이들은 온건 노조를 뽑아 사상 최대의 실리를 챙겼다고 본인들도 인정했다. 그런데도 올해 NL계 노조 집행부를 뽑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뽑히지 않은 정치성이 강한 강성 집행부다.

 그래서 근로자들과 길게 통화하며 물어봤다. 근로자들도 “정치 지향성은 싫다”고 했다. 다만 “회사를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무엇이 노사 간에 이토록 깊은 신뢰 위기를 가져왔는지 따지고 들어갔더니, 그 첫 지점에 ‘98년 사태’가 있었다. 당시 외환위기로 회사는 1만3000여 명의 희망퇴직을 받으며, 경기가 좋아지면 리콜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자리는 비정규직으로 대체됐다. 근로자들은 “회사가 어려워지면 또 똑같이 할 것이다. 있는 동안 더 받아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경제위기의 조짐 앞에 근로자들은 회사를 신뢰하느니 ‘차라리 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 향상을 독려하고 신규고용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측도 ‘98년 악몽’을 이야기했다. 당시 구조조정 후유증에 몸살을 앓고 있는 사측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최근의 경제상황에서 새로운 시설 투자는 무모하다고 했다. 노사가 함께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나가는 현대차 생산현장은 아직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상흔에 발목 잡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걱정스럽다. 유럽 장기불황, 중국 성장세 둔화 등 위기의 조짐이 또 우리 산업현장에 다가오고 있어서다. 98년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