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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임신·에이즈 문제 외국인이 일으킨다? 한국인은 괜찮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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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장성한 자식을 둔 주변 지인 중에는 ‘혹시 우리 아이가 외국인과 결혼하겠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해본 이가 적지 않다. 자녀가 외국에 있는 경우 특히 그런 것 같다. 가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짐(?)이 엿보여 숙고 중이라는 분도 있다. 며칠 전 대학생 아들이 “인터넷 채팅으로 친해진 외국인 여자친구가 곧 한국에 놀러 온다”고 알려왔다. 군대까지 다녀온 대학생이면 어엿한 성인이다. 어디까지나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외국인이면 어떠냐, 귀띔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구나 라고 넘겨야 시쳇말로 쿨한 아빠일 텐데 속으로는 그 나라 어디 사는 누구냐, 공부는 무엇을 했으며 부모님은 어떤 분이냐 등 궁금증과 범벅된 끌탕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른다. 아직 쿨해지려면 멀었다.

 MBC TV가 지난달 28일 방영한 ‘충격 실태보고, 외국인과 이성교제’라는 시사 프로그램 때문에 국내 외국인, 국제결혼 커플들이 들끓고 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자질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증가하는 외국인들과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진실” 같은 자극적인 멘트와 배경음악이 담긴 프로그램이다. ‘쉽게 이뤄지는 신체접촉’ ‘어디론가 향하는 두 사람’ 같은 자막이 뜬다. 외국인을 만나 임신하자 연락이 끊기고, 셋방 보증금 300만원을 빌려줬다 떼이고, 심지어 에이즈 양성반응을 얻었다는 내용도 있다.

 ‘충격 실태보고’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내가 보기엔 보도의 기본요건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프로그램 자체가 더 충격이었다. 4분40초가량 진행된 방송은 ‘불편’하기만 했지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외국인 혐오증과 성차별을 멈춰주세요’라는 슬로건으로 페이스북에 결성된 항의모임에는 어제 오후 현재 8473명이 가입했다. 지난 3일 방송사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17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방송에 대한 항의의 뜻이 포함된 ‘국제 커플·친구 소풍’ 모임이 열린다고 한다. 프랑스 인터넷 언론에도 관련 기사가 떴다.

 인터넷에는 방송 프로그램을 옹호하는 댓글도 적지 않다. 외국인, 특히 백인 남성이라면 가리지 않고 좇는 ‘일부’ 한국 여성이 문제라는 글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좋은 사람 있고 나쁜 사람 있는 법이다. 게다가 남녀관계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성적(性的) 자기 결정권은 모든 성인의 권리다. 임신이나 에이즈 감염? 누구나 조심해야 할 일이지 외국인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돈 떼먹는 짓도 마찬가지다. 잠깐만 생각해도 너무나 뻔한데 외국인이라는 틀 안에 모든 것을 넣으려 했으니 인종차별·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혐의를 받는 것 아닐까. ‘쿨’하건 ‘핫’하건 상관없이 상기해야 할 게 있다. 인류 모두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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