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이냐 독일 국민이냐 … 메르켈, 선택의 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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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총리가 5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슐로스메세베르크에서 열린 정부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 각료와 함께 건물에 들어가다 뒤돌아보고 있다. [슐로스메세베르크 로이터=뉴시스]

앙겔라 메르켈(58) 독일 총리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과 독일 국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유로존은 도와달라며 연일 아우성이다. 급기야 5일(현지시간)엔 스페인이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재무장관과 예산부 장관이 나서 “시중은행 부실화 때문에 정부의 자금줄이 막히고 있다”며 “유럽 구제금융 기금을 이용해 시중은행을 살려 달라”고 외쳤다. 이날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을 받았어도 (긴축에 따른 침체 때문에) 세금이 걷히지 않아 7월 초면 국고가 바닥난다”고 발표했다.

 독일 국민은 그리스 등의 도움 요청에 신물이 나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국민 60% 정도가 메르켈이 스페인·그리스 요구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는 쪽이었다. 재정긴축에서 성장으로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프랑수아 올랑드(58) 프랑스 대통령과도 강하게 맞서기를 바랐다. 또 절반 이상이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지지했다. 39%만이 그리스를 껴안고 가야 한다는 쪽이다.

 메르켈의 선택이 어느 쪽이든 적잖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유로존을 선택하면 정권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반면에 “그가 독일 국민의 뜻을 따르면 독일이 유로화 시스템을 해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듯하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일 전망했다.

 일단 메르켈은 침묵 모드에 들어갔다. 참모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뜻을 내비칠 뿐이다. 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진 2009년 11월 이후 세 번째 침묵모드다. 그는 2010년 7월과 지난해 12월 말문을 닫았다. 그때마다 “메르켈이 시장의 움직임에 눈감고 있다. 우직함인가 아니면 우둔함인가?”라는 비난이 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블룸버그 통신은 “메르켈의 침묵 때문에 5일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 회의에서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라고 5일 보도했다.

 메르켈의 침묵은 비생산적이지 않았다. 그는 침묵 뒤엔 어김없이 큰 그림(그랜드 플랜)을 내놓았다. 유럽 재정안정기금(EFSF) 설치나 신재정통합 등이 그 예다. 이번에도 그럴까. WSJ는 유럽연합(EU) 고위 관료의 말을 빌려 “(메르켈이) 이미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메르켈의 큰 그림은 이달 말 유럽 정상회의 때 공개될 예정이다. 지금까진 그의 참모들의 입에서 조각 정보들이 흘러나왔을 뿐이다. 그것들로 퍼즐 맞추기를 해보면 “메르켈은 회원국 경제정책 주권 가운데 대부분을 넘겨받을 요량이다(WSJ).” 위기를 틈타 통합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하자는 것이다.

 먼저 메르켈은 금융감독을 하나로 묶을 요량이다. 그의 참모들은 EU 실무그룹 회의에서 금융시장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감시·감독 권한을 EU의 독립 기구에 넘겨주자고 제안했다. ‘EU 예금보험공사’를 세워 여차하면 금융회사 구제에 나서게 한다는 복안이다.

 메르켈 쪽은 EU 조직을 활용해 프랑스 등이 요구하는 통합채권(유로본드) 발행 등을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사실상 통합 재무부 구성이다. 또 독일 산업계의 요구인 숙련공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시장 개방도 EU 회원국들에 요구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회원국들이 경제 성장을 위해 반드시 추진해야 할 경제개혁 리스트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메르켈의 그랜드 플랜이 EU 회원국의 동의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먼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에게 줄 것을 주고 설득해야 한다. 올랑드는 시스템 개혁보다 당장 위기를 진정시켜 놓고 봐야 한다는 쪽이다. 이를 위해 유로본드를 발행하고 긴축 고삐를 풀자고 했다. 메르켈이 독일 유권자들의 반대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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