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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인산일에 6·10 만세운동 주도한 고려공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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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호 26면

1926년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 시위 장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1926년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 시위 장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신의주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는 일경의 급습에 대거 붕괴되었다. 중앙집행위원 7명 가운데 김두전(金杜佺), 유진희(兪鎭熙), 정운해(鄭雲海)가 검거되었고,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도 체포되었다.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출국한 조동호를 제외하면 김재봉(金在鳳), 김찬(金燦), 주종건(朱鍾建) 세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코민테른 파견원으로 거처가 불분명했던 김재봉·김찬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원 검거’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⑩ 2차 조선공산당

서울 돈의동 명월관 뒤 김미산(金美山)의 한옥에 은신해 있던 김재봉은 김찬·주종건과 후계당(黨)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세 사람은 간부 후보였던 강달영(姜達永), 홍남표(洪南杓), 김철수(金綴洙), 이봉수(李鳳洙), 이준태(李準泰) 등에게 후계당을 맡기기로 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조선일보 지방부장 홍덕유(洪悳裕)를 통해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강달영(姜達永)을 만났다.

경남 진주·합천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복역했던 강달영은 중앙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후계당 재건에 적임자였다. 민족주의자였다가 사회주의로 전향한 강달영은 1924년 4월 화요회 계열의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또한 동아일보 경제부장 이봉수(李鳳洙), 시대일보 업무국장 홍남표(洪南杓)와는 같은 언론계 인사로 안면이 있었고, 새로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된 권오설과 이준태와는 같은 영남 출신에 노농총동맹 집행위원으로서 친분이 있었다. 김철수와 이봉수는 상해파였지만 분파적 견해를 내세우지 않아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처럼 극심한 내분이 없었다.

6·10만세시위를 주도한 권오설. 박헌영이 투옥된 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강달영은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자리를 조공 경남 간부인 김재홍(金在泓)에게 넘겨주고 상경했다. 1926년 2월 경운동 29번지 구연흠(具然欽)의 집에서 회의를 개최해 책임비서 강달영, 비서부 차석 이준태, 조직부 이봉수·홍남표, 선전부 김철수로 구성된 후계당을 출범시켰다.

고려공청의 새로운 책임비서 권오설은 당 규칙에 의해 자동으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전덕(全德)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러시아 공산당학교 출신의 김정관(金政琯)까지 모두 7명이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일경의 집중 추적을 받던 김재봉과 김찬은 해외 출국 기회를 엿보았다. 이준태가 일제 신문 조서에서 “자기들(김재봉·김찬)은 일시 조선을 떠날 뿐이고 해외에 나가서도 간부의 성질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그때그때 적당히 지휘할 것(‘강달영 외 48인 조서’)”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망명지에서 계속 조공을 지휘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재봉은 고급 담배가 다수 소비되는 것을 매음굴로 의심한 일경에 의해 12월 19일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 밀항에 성공한 김찬은 강달영에게 자신과 조동호·조봉암을 ‘중앙간부 해외부’라고 자칭하면서 ‘대내·대외의 중대한 문제는 언제라도 자신들과 협의해 처리해야 하며, 국제(코민테른)에 보내는 보고문 및 기타 중대한 교섭 같은 것도 전부 임시부(중앙간부 해외부)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달영은 조공 중앙집행위원회 황산(黃山:강달영)이란 가명으로 답장을 보내 조봉암을 중앙위원으로 인정할 수 없고 ‘우리가 대리일지라도 정원을 모두 정해 중앙의 실권을 잡고 있는 이상, 두 동지(김찬·조동호)는 중앙간부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중앙의 지도를 받아 일에 종사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해 볼셰비키당을 지도한 적은 있지만 강달영은 김찬 등을 조선의 레닌으로 대접할 생각은 없었다.

강달영이 후계당을 이끌 무렵인 1926년 4월 26일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조공은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지만 비밀리에 후계진용을 갖춘 조공과 고려공청이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해로 망명한 김찬은 직접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창덕궁 주인의 서거에 제(際)하여”라는 격문 5000장을 이삿짐으로 가장해 만주 안동현을 거쳐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權五卨)에게 보냈다. 황제라는 표현 대신 ‘창덕궁 주인’이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이었다. 그는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공 학생부의 프랙션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시위를 준비했다.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이자 조공 야체이카 책임자였던 박래원(朴來源)에게 원고 5종과 200원을 주면서 인쇄를 부탁했다. 박래원은 민창식(閔昌植)과 명치정(明治町:중구) 앵정(櫻井)상점에서 인쇄기 2대를 구매해 약 5만 장의 격문을 인쇄했는데,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배포해 3·1운동 때처럼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김단야가 보내기로 한 거사자금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격문을 일단 천도교 잡지사인 개벽사 구내에 있는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숨겨두었는데 뜻밖의 사건으로 시위 계획이 탄로났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중국 화폐 위조사건이 발생한 뒤 오사카 경찰서에서 한국인 연루자 세 명의 체포를 종로경찰서에 요청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이 체포될 때 위조지폐와 격문 한 장도 압수되었다.

격문의 출처를 탐색한 결과 권오설이 평북 선천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안(安)씨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단야로부터 자금이 오지 않자 권오설은 안씨에게 5000원의 자금 지원을 부탁하면서 격문 서너 장을 준 것이 발각된 것이라고 동아일보(1926. 6. 19)는 보도하고 있다. 격문을 인쇄했던 박래원은 손재기 부인과 친했던 개벽사 제본부 여직공이 격문이 담긴 상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1~2장을 가지고 간 것이 지폐 위조사건을 수사 중이던 일경에 발각된 것이라고 달리 증언했다.

일경은 천도교 계통의 개벽사 수색 와중에 손재기 집안에 보관 중이던 격문 상자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것이 6월 4일께였는데 조공의 많은 간부가 체포되거나 수배당했다.

6월 10일 인산일 하루 전 조선총독부는 용산 조선군사령부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5000여 명에게 시내를 행진하게 하고 3·1운동 발생지였던 파고다공원에 주둔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순종의 시신을 실은 대여(大輿)는 6월 10일 오전 8시에 돈화문을 떠났다. 기마경찰대가 애도행렬을 주시하는 가운데 인산 행렬이 황금정(黃金町:중구 을지로)까지 늘어섰다. 순종의 후사였던 이왕(李王:영왕)과 이강(李堈:의왕)이 탄 마차가 대여 뒤를 따르는 와 중에 8시40분쯤 행렬이 송현동(松峴洞)에 이르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 수십 명이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문이 이왕의 마차 부근까지 휘날리는 가운데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가세하고 기마경찰들이 달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9시쯤에 종로 3정목 동양루(東洋樓)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격문을 뿌렸고, 9시20분쯤에는 황금정 부근의 도립 사범학교 학생들도 가세했다. 인산 행렬이 동대문을 지나던 오후 1시쯤에는 동대문 부인병원(婦人病院) 앞에서 양복을 입은 청년 한 명이 깃발을 들고 호각을 불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자 군중이 대거 가담했고 장사동(長沙洞) 부근에서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뿌렸다. 3시쯤에는 동묘(東廟) 앞에서 중동(中東)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는 등 인산 행렬이 지나는 곳곳마다 만세시위가 발생했고 일경과 기마경찰이 달려들어 아수라장을 이뤘다.

시위는 고려공청 산하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대학생들과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인 통동계(通洞系)에서 주도했다. 사건 당일 종로경찰서에 105명, 동대문서에 50여 명, 본정(本町)서에 10여 명 등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시위사건이다. 일경은 김찬이 상해에서 화물로 위장해 보낸 격문의 교환증이 강달영을 거쳐 권오설에게 들어간 사실을 확인하고 강달영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7월 17일 명치정(중구)에서 바나나 행상으로 변장한 강달영을 체포했다. 일제의 ‘제2차 조공당 검거(朝共黨檢擧)’라는 사료에 따르면 강달영이 체포 후 일절 자백을 거부한 채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고 전한다. 당시 일제 고등계의 심문은 상해 영사관 경찰에게 고문 받던 병인의용대원 이영전(李英全:본명 이덕삼)이 숨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나중에 자신이 책임비서라고 자백한 강달영은 투옥 후 고문후유증으로 한때 정신이상이 발생했다.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권오설도 1930년 고문 후유증인 폐렴으로 옥사했다.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조공과 고려공청은 또다시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