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상 모든 존재에 고루 스민 아름다움 당신은 보이는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2호 22면

1 가브리엘 메추의 ‘편지 읽는 여인’,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더블린

가수가 노래한다. 절절한 사랑 노래다. 카메라가 관람석을 비춘다. 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자도 울고, 알 없는 안경을 쓴 젊은 여자도 운다. 사연이 많다. 주말의 TV를 보면 대한민국은 영락없는 사연 공화국이다. 사랑이 주요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보편적인 사랑의 시대다. 사랑은 일찍이 시문학을 지배했지만, 그림에 등장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은 있었으나 신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사랑만이 그림 속에는 등장할 권리가 있었다. 아니, 사랑에 빠진 남녀뿐 아니라 술 취한 주정뱅이,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아낙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도 후반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37>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

이런 그림을 본 미켈란젤로는 가차없는 독설을 날렸다. “혹자의 눈에는 괜찮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예술성도 없고 논리도 없으며, 대칭도 없고 비례도 없으며, 엄격한 선택도 없고 분별력도 없으며 데생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 골격도 없고 힘줄도 없다.” 독설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시를 쓰기도 했으니, 독설도 예술적일 수밖에.

“회화는 본질적으로 그려진 것을 예찬하는 것”이라고 츠베탕 토도로프는 『일상예찬』(뿌리와 이파리, 2003)에서 말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일상은 예술적으로는 예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현실을 그리되 끊임없이 이상적인 것(골격과 힘줄)을 추구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의 눈에는 시시한 일상을 그린 그림은 고귀하지 못한 것이었다.
역사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정물화-풍속화 순으로 회화 장르에 차등을 두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관념이었다. 예술은 고귀한 자의 고귀한 것이었다. 이 세계는 웃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엄숙함의 세계였다.

2 가브리엘 메추의 ‘편지 쓰는 청년’,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더블린

그런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런 고정관념이 본격적으로 깨졌다. 당시 네덜란드는 왕정이나 교회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일찍이 안정적인 시민사회가 건설된 나라였다. “벽에 재미난 그림 한두 점을 걸어놓지 않은 나막신 가게가 없을 정도로” 네덜란드에서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예술은 그들의 일상을 예찬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림에 그나마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은 거기에 ‘도덕적 교훈’이 있기 때문이라고 후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토도로프는 이 생각에도 의문을 갖는다.
그림 속 여인은 편지를 받아든다. 사랑을 암시하는 강아지는 발 밑에서 끙끙대고, 하녀는 말없이 커튼을 들춰 그림을 보여준다. 격랑에 휩싸인 배가 그려진 풍경화는 편지가 야기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암시한다.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지를 읽는다. 자세를 보니, 아마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내용인 듯하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가브리엘 메추가 그린 그림 ‘편지를 읽는 여인’이다.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헛된 사랑에 대한 경고인가? 그러나 그러기에는 여인의 자태가 너무 곱고 화가의 솜씨가 너무 좋아서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잠시 도덕적 훈계를 잊게 된다. 여기에는 도덕적 훈계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애정” “현실에 대한 따뜻한 호의”다.

풍속화들은 스텐과 테르보르흐, 호흐, 베르메르, 렘브란트 그리고 할스 같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모두의 공통점이다. 일상에 대한 긍정은 지렛대가 되어 서양문화사에 빛나는 한 대목을 만들어냈다. 네덜란드 풍속화는 전 유럽을 감염시킨 “찬양과 비방, 선과 악,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적인 바이러스”에 저항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문화를 지배하던 이원론이라는 두터운 도식의 틀을 깨어버린 것이다.

토도로프는 문학과 회화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논의를 이끌어 나간다. 문학 텍스트에 도덕적 교훈이 들어가면 텍스트 전체에 그 메시지가 스며들어 형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그림의 경우에는 도덕적인 교훈 때문에 이미지가 반드시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화가들은 예쁜 여자의 비단 옷자락을, 잘 정돈된 정갈한 실내를, 싱겁게 웃는 사람의 미소를, 빗자루를 꼼꼼히 그렸다. 그러면서 도달한 것은 “아름다움이란 세상 모든 존재 속에 고루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이미지들 앞에서 신학이나 철학은 한걸음 물러선다. 네덜란드 풍속화는 미덕도 악덕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의 충일한 기쁨으로 초월한다.”

좀 길지만 이러한 태도에 관해 토도로프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직접 들어보자.
“인간 세계에서는 불화, 불만족, 미완성이 군림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런대로 세상은 좋은 것이다. 테르보르흐는 세상에 열광한 사람도, 절망한 사람도 아니다. 인간 조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미망에서 깨어난 공감, 헛된 공상을 버린 호기심 같은 것이다.”
대가의 문장이고 촌철살인의 통찰이다. 나는 이 구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주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인용했다. 한 작가에 대한 설명을 넘어 책 전체에 흐르는 시대의 태도이고, 토도로프의 태도다.

토도로프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유명한 문학이론가다. 그러나 이런 통찰은 지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요는 츠베탕 토도로프라는 사람 자체다. 그가 삶을 그렇게 이해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원숙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말들이다. 그는 이론에 선행하는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토도로프의 지적대로 일상을 그리는 미술은 19세기, 심지어 20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팝아트의 등장으로 현대미술에서는 영화, 만화, 상품 라벨까지 ‘일상’이 넘쳐난다. 그러나 과거 거장들의 특징인 “진실에 대한 애정” “현실에 대한 따뜻한 호의”도 더 이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팝아트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보다 상품에 대한 부러움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기꺼이 상품을 닮고자 한 차가운 예술이다. 반대로 현대인들의 일상은 더 위태롭고 각박해졌다. 그래서 “진실에 대한 애정” “현실에 대한 따뜻한 호의”는 더욱더 필요하다. 17세기 풍속화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다.
그러나 그런 축복받은 시대는 지나갔다. 그때는 삶에 대한 긍정성을 모두 공유하고, 화가들은 의심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시대였다. 축복받은 시대의 또 다른 징표는 평범한 재능을 가진 작가들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술적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지혜의 문제”였기에, 렘브란트나 베르메르 외에도 많은 작가가 함께 활동하면서 다채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갔었다.

그림보다 인생의 현안이 급한 사람에게도 나는 이 책을 권한다. 그림은 돈을 버는 법도, 취업을 하는 법도, 승진하는 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비법을 하나 가르쳐준다. 17세기 풍속화가들은 우리에게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보여준다. 이것이 비록 절판된 책이지만,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 이유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 -이것이 츠베탕 토도로프가 네덜란드 풍속화 속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진실이다. 우리는 현실을 지나치게 타계하고 개선해야 할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