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또 다른 모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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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30면

중국은 자기중심적이고 거칠며 대국주의적인 구석이 많다고 세계가 우려한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베이징 근무 당시 그리 단순하지 않은 모습도 나는 보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중국은 미국을 누르고 금메달 1위에 올랐다. 한데 연일 자국선수의 활약상을 보도하던 신문 논조가 차츰 변해 갔다. ‘다이빙·탁구·배드민턴·양궁. 우리가 금메달을 딴 것은 세계적으로는 비인기 종목’이라며 자만심을 경계했다.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중국은 덩치만 클 뿐 강대국이 아니다. 많은 병폐를 안고 있다’ ‘우리는 아직 중간 이하의 개도국’이라며 자만과 오만에 빠지기 쉬운 여론에 제동을 걸었다.

중국 각 대학은 일본어 학습이 성행하고 열성적인 일본 문화 팬이 많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베이징대학에서는 노래·기모노·무예 등 대규모 일본 문화행사를 학생들이 개최했다. 인민대학에서는 저명한 교수들이 다른 대학 학생들까지 모아 일본 유학을 권유하는 심포지엄을 열었다. 칭화대학에는 일본 만화를 일본인 이상으로 연구하는 동아리가 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더빙 성우가 일본에서 오자 홍콩에서도 팬들이 달려오고, 행사장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대학별 J팝 대항전은 일본인 같은 발음, 가수 같은 학생들이 학교의 명예를 걸고 열전을 벌였다. 최신 일본 가요나 애니메이션을 내가 이들한테 배웠을 정도다.

45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애니메이션 ‘잇큐상’, 드라마 ‘오싱’과 다카쿠라 겐(高倉健), 구리하라 고마키(栗原小券),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 등의 배우를 기억했다. “80년대, 시골 촌구석에서도 일본 영화를 봤다. 3억 명은 될 것이다. 일본 배우를 동경해 머리 모양과 복장도 흉내 냈다”고 눈을 반짝이며 그리운 듯 말했다.

루쉰(魯迅)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일본에 유학했고, ‘국부(國父)’ 쑨원(孫文)은 긴 세월 일본에 머물며 일본인과 깊이 교류했다. ‘과학’ ‘정당’ ‘사회’ 등의 기본 어휘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입된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명문고생들의 감상문을 발췌해 본다. “베이징은 일본의 원조로 건설된 인프라가 많다. 일본 배척주의자는 물도 마시면 안 될 것이다.” “사람과 부딪쳐 사과했더니 상대방은 더 깊이 머리 숙여 사과했다. 일본의 도로는 깨끗하다. ‘예의지국’이란 중국에서 왜 기본 매너가 안 되나?”

당 기관지도 과격한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신자로 간주하며, 일본인 모두를 욕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경향은 세계 조류나 역사적 진실, 민족의 이익에 반한다는 강렬한 주장이었다. 역사도 제대로 모르며 남을 비난하고 ‘민족, 애국’을 앞세우는 사람이 실은 중화민족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민족의 근본 이익에 반하는 거라고 단언하고 있다.

전쟁으로 일본에 대한 매서운 눈길도 존재한다. 하지만 두터운 일본 연구와 교육, 문화 및 청년교류의 축적을 느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평판이 좋지 않음은 물론 알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 학문도 스포츠도 청년교류도 수십 년에 걸쳐 각국과 네트워크를 구축해온 숱한 사람들이 있다.

중국에는 자유·민주에 기반을 두지 않는 근본적인 함정이 있다. 인터넷에서는 대외강경론이 번진다. 그러나 해외에서 배우고, 자국의 문제점을 냉철히 파악해 여론을 계몽하며, 국가 진로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려는 엘리트가 각 분야에 있었다. 많은 모순을 안고 거구를 삐걱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국. 앞서와 같은 중국의 일면은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거칠고 단세포적이라면 지금 같은 발전도 없었을 터이다.

폐쇄와 개방, 독선과 학습. 어느 나라나 양면성이 있다. 한국도 일본도. 일·한이 연계해 중국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우리의 큰 사명이다.



미치가미 히사시(道上 尙史) 도쿄대 법대 졸, 서울대, 하버드대 석사. 중국·한국에서 일본대사관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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