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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다문화가정 2세는 한국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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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이소라
이화여대 불문과 4학년

“이제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중학교 시절 시골에서 도시 학교로 매일 기차를 타고 통학했던 그는 촌스러웠고 키가 멀대같이 컸다. 어릴 때는 으레 아무 의미도 없는 말장난으로 친구를 놀려먹곤 한다. 그는 키가 컸으므로 그냥 ‘대짜’로 통했다. 대짜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대짜였고, 결혼을 해서도, 자식을 장가보내도 여전히 대짜였다.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동창회에 온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경고’했다. 그 후론? 그래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오랜 친구, 대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천양희 시인은 노래했다. 그러나 세상엔 원치 않는 이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이가 적잖다. ‘대짜’씨를 포함한 모든 부끄러운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다. ‘코시안(Kosian: 한국인(Korean)과 아시아인(Asian)의 합성어)’은 어떤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동남아시아인인 아이들을 뭉뚱그려 지칭하는 용어인 코시안. 다문화가정 2세 중에서도 유독 동남아시아 출신 결혼 이민자의 자녀에게만 이런 호칭이 존재한다. 당사자는 어떤 생각일까. “우리 아이와 한국 아이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런 ‘이름표’는 원치 않아요.” 당사자가 원치 않는 호칭을 사회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시 혹은 경멸의 의미를 내포한다.

 사실 동남아계와의 혼혈인을 코시안이라 부르기 전에도 그들을 향한 차별은 있었다. 아이들은 피부색과 어눌한 한국어 때문에 따돌림 당했다. 그러나 그들을 코시안이라는 정확한 명칭으로 지칭할 수 있게 되자 코시안은 코리안과는 결코 같을 수 없는 이질적인 집단이 돼 버렸다. ‘틀 짓기’는 그래서 위험하다. 한 번 프레임 속에 들어간 것은 쉽게 그것을 탈출할 수 없다. 다문화가정 2세들이 우리 사회에 순조롭게 통합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다문화가정지원법안’은 2006년에 제출됐다. 그러나 2012년 현재 코시안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더욱 고착화됐다. 코시안이라는 용어가 버젓이 사회에 남아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통합은 요원한 일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불러서 꽃이 되는 이름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춘수 시인이 시 제목을 ‘이름’이 아닌 ‘꽃’으로 지은 건 의미심장하다. 결국 중요한 건 이름으로 인해 일어나는 변화, 그리고 결과일 테다. 다문화가정 2세들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자신을 꿰맞추지 못해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런 그들을 화사한 꽃이 되는 이름으로 불러주지 못할망정 코시안이란 생소한 합성어로 규정짓는 건 일종의 정신적 폭력 아닌가. 그들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코리안’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소라 이화여대 불문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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