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글로벌 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울컥 화가 났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리스의 경제위기 재발로 한국 주가가 급락한 16일 얘기다. “상투(주가 최고점)에 주식을 샀다”고 푸념하는 친구의 전화를 받은 게 시작이었다. 마이너스 수익률의 내 펀드도 떠올랐다. 태평양 건너에서 나온 광우병 젖소 한 마리에 온 나라가 노심초사했던 직후여서 더 그랬다.

 답답한 마음은 그리스 국민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이번 위기는 그리스 총선에서 연립정부 구성이 안 되면서 유로존 탈퇴 세력이 득세할 것이란 우려에서 비롯됐다. 도대체 그 나라 국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매번 이 모양인가. 2010년에도 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신 화염병을 들었다.

 유재원(그리스학) 한국외대 교수가 생각났다. 국내에 몇 안 되는 그리스 전문가다. 전화기부터 들었다.

 -도대체 언제쯤 그리스가 각성하는 순간이 옵니까.

 “허허.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금붙이라도 팔아야 하지 않나요.

 “내놓을 금붙이가 없어요. 연금 100만원 받던 사람이 40만원 받아요. 일상에서 받는 타격은 한국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해요.”

 -파국이 뻔한데 유로존 탈퇴를 외치는 정당을 지지하는 표심은 뭡니까.

 “그리스인은 유로존에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보다 기존 정당에 대한 반감이 더 큰 거죠.”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유로존 탈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독일 등의 양보와 지원을 요구할 겁니다.”

 결국 앞으로 꽤 긴 과정이 남았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 사이 우리는 또 주가 하락에 열 받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저서 『세계는 평평하다』등으로 세계화 바람을 일으킨 그다. 지난해 미국에서 그의 강연을 들었다. 노트북을 뒤져 기록을 찾았다. 아뿔싸. 세계화 낙관론자인 그도 에너지 빈곤 등 5대 과제를 제시했다. 그리스도 골친데, 빈곤국 에너지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얘긴가. 이쯤 되면 스트레스도, 피로도 ‘글로벌’이다. 세계화는 현실이다. 그러니 세계화의 피로에서 비켜날 순 없다. 그때그때 피로를 풀 따름이다. 원인 제공자로부터 위로 받긴 쉽지 않다. 시장의 세계화 속도는 빠르지만 정서의 세계화는 더디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름지기 최고의 피로 회복제는 바로 옆에서 쓰다듬고 안아주는 것이다. 가슴에 팍 와 닿는 좋은 국내 뉴스가 절실하다. 그런데 매일 싸움판이니 이마저도 난망이다.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장률은 회복제로는 역부족이다. 소득 증가처럼 손에 잡혀야 피로가 풀린다. ‘도전’ ‘극복’ 같은 말로 다그칠 일도 아니다. 오랜 위기에 지친 투자자들은 마음부터 다독여주길 원한다. 정부 책임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은 거다. 걱정인 건, 돌아가는 모양새가 7월 런던 올림픽을 순간 마취제 삼아 피로를 풀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