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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경제정책이 실종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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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영욱
논설위원

매크로 폴리시(macro policy·거시정책)가 사실상 실종됐다. 재정정책 얘기다. 경기가 나빠지면 정부가 지출을 늘리는 게 당연한 원칙이다. 경제가 더 큰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해서 경제를 안정시키는 건 정부의 마땅한 책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런 원칙과 책무가 작동을 않고 있다. 경기가 심각한 국면에 빠지고 있고, 앞으로의 경기도 낙관하기 어려운데 말이다.

 정부가 전혀 대책을 내놓지 않은 건 아니다. 투자 활성화,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긴 했다. 하지만 말이 활성화고 정상화지,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정부 스스로 “모기 다리 긁는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실토할 정도로 내용이 빈약하다. 대체 왜 이런 걸까.

 경기가 나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7%에서 3.5%로 끌어내린 게 단적인 증거다. 당초 전망치인 3.7%도 사실 문제였다. 전망대로라면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3%대 성장이라서다. 지금까지 성장률이 2년 연속 잠재성장률을 밑돈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터에 성장률을 0.2%포인트 더 내린 것이다. 지난해 7월 전망치(4.6%)와 비교하면 무려 1.1%포인트나 떨어졌다.

 실물 경기도 가라앉고 있다. 1분기 상장사 실적은 ‘어닝 쇼크’였다. 삼성전자를 빼면 영업이익이 무려 11%나 줄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정도만 괜찮을 뿐 다른 기업들은 죽 쑤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삼성전자 착시 현상이다. 3, 4월 수출도 잇따라 감소했다. 매년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이던 중국 수출은 1분기에 겨우 0.7% 늘었을 뿐이다. 1분기 민간소비 증가율도 1%에 그쳤다. 소비 부진은 물론 우리 경제의 고질병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1000조원에 가까운 가계부채 문제가 추가돼 더욱 꼬였다. 장담하건대 가계 빚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소비부진 해결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사방이 지뢰밭이다. 유럽 위기는 최소 5년은 더 간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유로존의 재정 통합이 근본 해결책이지만 이를 기대하긴 어렵다. 프랑스 대선 결과는 이를 더 꼬이게 만들었다. 미국 경제 불안도 여전하다. 2차 불황(더블딥) 우려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본격적인 회복세는 빨라도 2015년은 돼야 할 것이다. 당연히 세계경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우리의 경기 회복도 힘들 수밖에 없다.

 과거 정부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경기 활성화에 전력을 기울였을 난국이다. 경기 논쟁도 치열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정부는 팔짱 끼고 구경하고 있고, 경기 논쟁은 아예 없다. 3.5%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가, 세계경기가 나쁘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탓인가.

 근본적으로는 균형재정 도그마가 재정정책을 실종시킨 원인이라고 본다. 지난달 28일 열린 청와대 만찬이 단적인 예다. 내년 균형재정 달성을 발표했던 재정전략회의에 이어 열린 만찬에서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재정 건전성만 외쳤다. “다음 정부에 곳간을 가득 채워서 물려주도록 하겠다.” 만찬 자리가 그런 결의를 하는 “출정식 자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경기가 더 나빠질 가능성에 대비해 재정지출을 확대하자는 목소리는 일절 없었다고 한다.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 일은 역사적 소명”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불호령 때문일 수도 있다.

 오해 없기 바란다. ‘균형재정이 나쁘다’거나 ‘복지 포퓰리즘을 막지 말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균형재정이 도그마로 작동해선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스스로 ‘곳간지기’라 자처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는 풍토가 문제라는 얘기다.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고 논쟁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적자재정도 해야 한다. 나쁜 건 정부 지출이 아니라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거다. 경기가 나쁠 때 교육·훈련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지출은 바람직하다. 경기 인식이야 다를 수 있다. 지금 경기가 바닥이고 하반기부터 회복된다는 정부의 낙관론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유념해야 할 건 정책 유연성이다. 정부가 도그마에 빠져 정책이 경직되면 꼭 탈이 난다. 하물며 경기를 낙관하기에는 지금 위험 요인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