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성폭력 피해자를 감싸야 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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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선 성폭력을 법적으로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했다. 이에 오히려 여성에게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며 책임을 요구해 성폭력을 당하고도 쉬쉬했고,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 보호조치마저도 전무했다. 그러다 최근 성폭력이 형사범죄로 규정되고, 피해자에 대한 제도적 보호조치도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응급치료와 심리치료를 전담하는 원스톱지원센터와 해바라기 센터가 전국에 36곳 운영되고 있으며,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은 초동단계의 진술녹화로 수사기관에 다시 불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이런 진전 덕분이다.

 하지만 집단성폭행을 당한 여중생이 한국땅을 떠나고 온 가족이 여전히 정신적 고통 속에 살고 있는 A씨의 사례(본지 5월 9일자 1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이해가 미흡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A씨는 “피의자 처벌은 고사하고 피해보상, 심리치료도 형식적”이라고 말한다. 제도적 진전에 비해 실질적 도움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성폭력 피해자 보호는 제도적 보완과 함께 그 피해자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의식 전환 노력이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먼저 의료적 지원에선 사건 초동단계부터 피해자 편의와 보호를 중심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현재 피해자 치료는 응급진료와 사후 심리치료를 하는 기관이 나뉘어 있고, 의료비 지원도 사후 정산으로 하면서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이에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첫 진료기관에서 심리치료자가 지정돼 한꺼번에 연계치료를 하고, 치료비는 병원이 직접 국가에 청구하도록 하는 방안이 적극 검토돼야 한다.

 피해자 권리 실현을 위한 법률적 지원도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일 중 하나가 가해자들의 ‘합의 종용’ 사례다. 현재 법적으로는 피해자 가족이 법원에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지 않는 이상 이들을 제지할 방법이 없어, 이 과정에서 모욕과 충돌 등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에 사건발생 후 사법당국에 피해자 가족이 요청하면 가해자 측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입법도 요구된다. 또 가해자에 대한 가벼운 형벌로 인해 피해자의 고통이 크다는 점에서 처벌에 대한 사법당국의 의지도 보여줘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일반의 의식 속에 성폭력을 여전히 ‘정조 범죄’로 보는 관념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수사당국에서조차 ‘보호할 만한 피해자’와 ‘당할 만한 피해자’라는 이분적 사고로 피해자를 대함으로써 2차 피해도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경래 박사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통념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복지지원도 인색하다. 피해자 보호시설도 지역주민의 격렬한 반대로 들어서지 못하는 등 사회적 저항이 크다”고 말했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폭력성향의 하나라는 점에서 사회 전체가 피해자들을 포용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