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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길을 냈다, 비전 세웠다, 미래를 열어간다 … 이들 있어 한국의 앞날이 밝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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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홍진기 창조인상은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 발전기에 정부·기업·언론 분야에서 창조적인 삶을 실천하는 데 힘을 쏟았던 고(故) 유민(維民)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2010년 제정됐다.

세 번째 영예를 안은 올 수상자들은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창의성을 바탕으로 기존 가치를 넘어선 새 비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는 이홍구 전 총리, 송자 전 교육부 장관,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강준혁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홍구 심사위원장은 “기성세대의 과거 업적을 포상하는 기존 상들과 차별화해 젊은 세대의 미래 가능성을 격려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올해는 특히 상 제정 뒤 처음으로 여성 2명을 뽑았고 평균 연령도 39세로 ‘창조인’이란 이름에 걸맞은 수상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유민(維民) 홍진기(1917~86)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동양방송(TBC)을 설립하고 중앙일보를 창간해 한국의 대표언론으로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과학부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김진현 박사
뇌 신경망 지도 신기법 개척, 20년 걸리던 일 몇 달에 끝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김진현(41) 박사는 뇌 신경망 지도 기법의 개척자다. 과거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손금 보듯 신경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법을 지난해 개발했다. 뇌 신경 연결망은 행동과 기억·학습·감정·판단과 같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때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조직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뇌를 제대로 알기 위해 뇌 신경 연결망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폐증도 뇌 신경망이 비정상적으로 연결돼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박사의 새로운 기법이 뇌 과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다. 이 연구 성과가 발표되자 세계 주요 연구그룹들이 김 박사와 공동 연구를 제안해 오고 있다.

 뇌 신경 연결망을 알아보기 위한 기존 기법은 ▶뇌 신경 세포 간에 신호를 주고받을 때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측정하는 방법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죽은 세포를 관찰하는 방법 등 두 가지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수백억 개에 달하는 뇌 세포를 일일이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시드니 브레너 박사도 전자현미경으로 불과 300여 개의 신경세포를 가진 선충(線蟲-C. 엘레강스라고도 하며 가느다란 실처럼 생겼음)의 신경망을 지도화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다. 김 박사의 기법은 이를 단 몇 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 실험 쥐의 뇌 신경망 지도를 과학자 한 사람이 제작한다면 기존 전자현미경으로는 200년 정도 걸리지만, 김 박사의 방법은 10년 정도면 충분하다.

 김 박사는 녹색형광단백질(GFP)을 뇌 신경 연결망을 확인하기 위한 핵심 도구로 사용했다. 녹색형광단백질은 반으로 쪼개기 전에는 자외선을 쪼이면 빛을 내지만 쪼개 놓으면 그렇지 않다는 특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 단백질을 반으로 쪼갠 뒤 세포에 넣어 뇌 신경 신호를 주고받는 시냅스의 양끝에 달라 붙도록 했다. 이들 반쪽씩은 정확하게 시냅스의 송신단과 수신단을 찾아가 붙도록 유전공학적으로 꼬리표가 붙여졌다. 그 반쪽 조각들이 시냅스 양단에 성공적으로 달라붙는 순간 하나로 뭉쳐지면서 자외선에 빛을 내게 된다. 연구자는 뇌 세포를 얇게 자른 뒤 광학현미경 위에 올려 놓고, 녹색 형광을 내는 곳만 찾아 연결하면 뇌 신경망 지도가 작성된다. 쥐 뇌 신경 세포 하나당 시냅스가 2만~3만 개가 존재한다. 김 박사는 한꺼번에 7000개 정도의 시냅스에 녹색형광단백질을 붙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김 박사는 “시냅스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순간만을 잡을 수 있는 기법을 개발하는 게 과학자로서의 꿈”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런 기법을 개발한다면 뇌 연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뇌의 어떤 부위, 어떤 신경망이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박사학위 과정 당시 학습과 기억의 메커니즘을 시냅스의 분자적 수준에서 알아내려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그 후 창의적인 과학자들이 몰린다는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뇌 관련 연구 업적을 내기 시작했다. 2010년 11월 KIST 연구원으로 귀국했다.

글·사진=박방주 과학전문기자

◆김진현 박사=1971년 경기도 수원 출생 ▶성균관대 생물학과(95년·학사)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생물학 박사(2001) ▶미국 국립보건원(NIH)·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 연구원(2002~2010) ▶KIST 연구원(2010~현재)

사회부문 아주대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
응급의료체계 개혁 … 법 개정 이끌고 선진수술 도입

지난달 25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 이국종(43) 교수의 얼굴엔 극도의 피로감이 흘렀다. 말을 붙이기 미안할 정도였다. 전날 밤 10시쯤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 있다가 새벽 3시에 또 응급실로 나왔다. 횡경막이 파열된 70대 할머니 때문이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희귀병인 중증 근무력증이었다. 집도하지는 않았지만 최종 판단은 이 교수가 내렸다. 원래 이 교수의 이날 일정은 오전 강의, 오후 외래진료다. 그러나 기계에 몸이 눌려 실려 온 50대 환자 때문에 일정은 또 바뀌었다. 그의 일상은 늘 이랬다.

 지난해 그는 가장 주목받은 의사였다. 소말리아 해적 소탕작전 당시 중상을 입은 석해균(59) 삼호주얼리호 선장을 살려내면서다. 그는 국내 외상외과 분야에서 단연 최고로 꼽힌다.

 그는 열악한 중증외상환자 응급의료체계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해 왔다. 그 결과 정부는 지난해 전국 단위의 중증외상센터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응급의료 전용헬기인 ‘에어 앰뷸런스(Air Ambulance)’ 두 대도 처음 도입됐다. 한시적으로 과태료 등을 모아 쓰고 있는 응급의료기금 연장을 위한 ‘응급의료법’ 개정안도 마련됐다. 이 교수가 국내 응급의학계의 풍경을 창조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응급의료법’ 통과가 국회에서 발목이 잡히자 그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국민의 세금을 받고 일하면서 어떻게 출근을 안 할 수 있느냐”고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그 덕분일까. 법안은 2일 다른 민생법안들과 함께 국회를 통과했다. 그는 외상외과 분야에 헌신한 10년 동안 이런 좌절을 여러 번 겪었다. 병원을 적자로 몰아넣는 주범이었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품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이번 달이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외국 교과서에서만 나오는 수술도 과감하게 시도한다. 장기 손상이 많을 때 당장 생명에 위험을 주는 부위부터 응급수술로 막고, 배를 열어 둔 채 수술을 끝낸다. 급하게 배를 닫으면 장기가 다시 눌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명 ‘손상 통제(Damage Control)’ 수술법이다. 최대 21일까지 개복 상태를 유지한 환자도 있었다. 수술경험이 많고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수술이다. 지난해 대한외과학회는 새로 발행된 외과학 교과서에 이 수술법을 포함시켰다. 이 교수가 단독 집필했다.

 그의 환자들은 노동자나 농어민,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이다. 요즘 보는 환자들 중에도 공장 유압기에 몸이 으스러지고, 경운기 사고로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지고, 리어카를 끌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동거하던 남자한테 두들겨 맞는 등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이날 이 교수는 강의를 하러 가는 길에 본 낙화(落花) 이야기를 꺼냈다. 바람이 불면서 마지막 남은 벚꽃 잎이 한꺼번에 떨어졌다고 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라는 책에 일본인 하급 무사를 잡는 대목이 있는데 그 칼에 쓰여 있던 검명(劍名)이 떠올랐어요. ‘우리 짧은 인생이 사쿠라(벚꽃) 꽃잎처럼 떨어져 나가네’라는 내용인데. 인생, 짧잖아요.”

 그는 이날도 병원 당직실에서 쪽잠을 잤다.

글=박유미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이국종 교수=1969년 서울생. 95년 아주대 의대를 1회(88학번)로 졸업한 외상외과 전문의. 2002년부터 아주대병원에 재직 중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외상외과와 영국 로열런던병원 트라우마센터에서 연수했다.

문화부문 소리꾼 이자람
뮤지컬로, 가수로 … 우리 소리 지키는 만능 재주꾼

끼를 내보인 건 다섯 살 때였다. 작곡가이자 가수인 아버지 방을 들락거리며 고개를 까닥이던 자람이는 옹알옹알 따라 부르던 노래를 아예 취입하는 조숙함을 보인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하면 ‘예~’ 하고 달려가는 히트곡 ‘내 이름 예솔아’로 이자람은 일찌감치 소리 길에 들어선다.

 숙명이었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맺어진 은희진 명창과의 인연은 10년을 흘러흘러 소리꾼 이자람을 탄생시켰다. 목에 피가 맺히게 부르고 또 부르는 소리 공부로 그는 판소리를 제 몸에 들어앉힌다. ‘토종 에너지’를 받들어 받아들인 마음 덕일까. 스승의 가르침을 꾸정꾸정 좇아가며 판소리 독공에 애쓴 노고는 ‘제(制)대로 하는’ 젊은 소리꾼이란 평가로 이자람(33)에게 돌아온다.

 판소리 유파(流派) 중에서도 ‘동초제’를 배운 건 타고난 배우 이자람에게 더 넓은 마당을 깔아준 멍석이다. 가장 연극적인 판소리라 할 수 있는 동초제를 만나 그는 전방위 소리꾼으로 거듭난다. 판소리 완창 판에선 유파 방식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성으로 노래하고, 뮤지컬 무대에선 가성을 적절하게 섞어 연기한다. ‘아마도 이자람밴드’로 활동할 때는 젊고 발랄한 가수로 튄다.

 재주가 흘러넘치는 그는 판소리를 변주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 소리와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접붙인 ‘사천가’ ‘억척가’로 서양 본바닥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1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LG 아트센터에서 국내 관객을 만나는 ‘억척가’는 오는 11월엔 프랑스 리옹 국립민중극장 초청으로 유럽 연극 애호가 앞에 선다. 지난해 봄 ‘사천가’를 본 예술감독이 정중히 초대했다. 7월 28일엔 런던 올림픽 문화행사로 ‘사천가’가 런던 퀸엘리자베스 극장에 오른다. 그 사이에 ‘아마도 이자람밴드’ 첫 앨범을 내고, KBS 국악관현악단과 ‘적벽가’를 협연한다. 틈틈이 서울대 국악학 박사 논문 자료조사도 해야 한다. ‘동초제 수궁가에 나타난 창작 대목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앞으로 해나갈 평생 연구로 ‘판소리 창작의 타당성’이란 묵직한 주제를 끌어안았다.

 “그 옛날 소리꾼들이 읊었던 사설, 그 말의 경지가 출렁출렁 제 가슴을 두드리면 그렇게 느꺼울 수가 없어요. 가벼운 말로 깊은 얘기를 툭툭 던지는 사설을 재발견할 때마다 이 맛을 누가 알까, 흐뭇하죠. 판소리 사설은 오래된 도서관입니다.”

 그에게 판소리는 이야기다. “제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자람은 이야기에 집중한다. 판소리 사설을 인문학적 탐구로 구석구석 훑은 뒤 자신이 뿜어낼 수 있는 현대판 판소리를 창작하는 게 꿈이다.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나온 소리 길을 돌아봤어요. 함께 걸어온 이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도취되지 않는 게 나의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터지면 가만히 있기가 제 나름의 방식이죠. 판소리가 제 몸의 중심이 되고 그 길을 따라 흘러온 저의 모든 것이 원천기술입니다. 덤덤히, 가만히, 그 원천기술을 갈고 닦겠습니다.”

글=정재숙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이자람=1979년 서울 출생 ▶97년 전주 대사습놀이 학생부 장원, 2004년 일반부 장원 ▶99년 동초제 ‘춘향가’ 최연소 최장 시간 완창 기네스북 기록 보유 ▶서울대 국악학 석사 ▶2011년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서편제’로 여자 신인상 ▶‘아마도 이자람 밴드’ 멤버 및 판소리만들기 ‘자’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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