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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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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한독 낙농시범목장.

 독일이 한국에 낙농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만든 목장이었다. 경기도 안성에 있었다. 이 목장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꿈이 서려 있다. “우리 국민도 우유 한번 마음껏 마셨으면 좋겠다”는 가난한 나라 대통령의 바람이 독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의 피땀이 어린 것이기도 하다. 독일이 1969년 조성한 이 목장은 한국 낙농의 출발점이 됐다.

 이 목장이 지난달 21일 축산 테마파크인 농협 ‘안성 팜랜드’로 바뀌었다. 어린이를 위한 체험 놀이목장, 승마센터 등을 갖췄다. 압권은 호밀·유채 등이 심어진 100만㎡(30만 평)의 초원이다. 이미 수도권 내에서 목가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팜랜드의 개장은 ‘기르는 축산’이 ‘즐기는 축산’으로 바뀐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목장 땅을 그대로 두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수도권에서 이만한 땅을 새로 마련하려면, 산을 깎거나 건물을 허물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직장 초년병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남성우 농협 축산경제 대표는 “골프장이나 아파트로 개발하자는 압력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 건 하자’는 실적 욕구를 이겨낸 결과가 팜랜드다.

 지난달 서울 남산 면적 두 배의 임야를 국가에 내놓은 손창근 옹의 기부 이유도 지키기다. 그는 “개발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기부한다”고 말했다. 해당 임야 주변은 골프장이 지천이다.

 문제는 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지키는 일은 별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독목장 땅을 아파트 단지로 바꿨다면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담당 공무원은 얼마나 생색이 났겠는가. 그러나 누구의 공이건, 목장을 지켜온 게 새로운 농업의 씨앗이 됐다. 손창근 옹의 임야는 먼 훗날 또 다른 가치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요즘 정부 경제정책은 특별한 게 없다. 엊그제 나온 ‘1분기 경제상황 점검과 정책 대응방향’에서도 화끈한 걸 찾기 어렵다. 정부 당국자 표현대로 “모기 다리 긁는 느낌”이다. 이유가 있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뜨뜻미지근한 경제 상황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축이 관에서 민간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점도 원인이다. 그렇다면 무리한 정책을 펴지 않는 게 답이다. 나중에 부작용으로 돌아올 과잉 정책은 참고, 정말 필요할 때 쓰기 위해 힘을 아낄 때다.

 놀라는 얘기가 아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아 미뤄 둔 일은 많다. 다음 정부가 퍼주기를 못하도록 내년 예산 단속을 단단히 해두는 것도 그중 하나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유통구조 개선, 대외 경제협력 강화도 이럴 때 하면 된다.

 실적으로 평가받는 시대다. 누구나 직책을 맡으면 돋보이는 결과를 내고 싶어 한다. 뭐든 하라는 쪽의 목소리는 크다. 그러나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열정만큼이나 무리수를 참는 냉정도 필요하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있다. 하지 말아야 할 때 하지 않으려면 하라는 쪽보다 더 큰 용기와 실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