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동네]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달팠던 삶의 질곡과 병마가 오히려 그에게 그토록 맑은 영혼의 목소리를 가져다 준 걸까.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씨의 글 속엔 동물과 사람,달과 소나무,아니 강아지똥까지 아우르는 자연의 밝은 생명력과 그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아침 이슬처럼 빛난다.

이번에 새로 내놓은 초등학교 저학년용 동화집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도 예외가 아니다.

6편의 짤막한 이야기들은 특별히 교훈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작가의 배려가 이 겨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세심한 연필선을 이용,모노톤과 컬러색을 적절히 조화시킨 그림들은 전래 동화같은 분위기를 더해준다.

엉덩이를 기운 바지 입기가 창피했지만 그걸 입으면 꽃들이 더 예쁘게 피고 시냇물에 고기들이 더 많이 살고 하늘의 별들도 더 예쁘게 반짝일거라는 엄마 얘기를 믿고 깡총깡총 뛰며 유치원에 가는 아기 너구리 또야, 제비꽃 피는 어느 날 장터를 구경한 뒤 약 장사에게 꿀밤을 맞으며 쇼를 하던 아기 원숭이 꿈을 꾸는 찔룩이 동생 개미, 혼자서 끙끙대다가 아기 사슴의 도움으로 가지에 달린 물렁감을 쉽게 따먹게 된 아기 돼지 통통이 등 사랑스럽고 귀여운 주인공들은 너무도 단순해 보이는 행동들을 통해 깊고 넓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불이 난 강 건너 마을을 돕는 숲 속 동물들, 그리고 떡 한 조각도 아낌없이 나누며 살아가는 오두막 할머니의 이야기들은 교훈적 ·기독교적인 색채가 다소 강한 것이 흠이지만 나눔의 기쁨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이 살갑다.

1984년에 처음 출간된 '몽실언니'(창작과비평사)는 지금까지 75만부가 팔려 아동문학 단행본으로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요즘도 두달에 1만권씩 재판을 찍을 정도라고.

한국 아동문학의 보석같은 존재 권정생씨의 건강이 갈수록 악화돼 현재는 손님조차 겨우 맞을 정도라는 소식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 와중에도 올 여름에 유아 및 저학년용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웅진닷컴 ·7천5백원)를 내놓는 등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