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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서울, 다시 고궁을 나오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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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김수영(1921~68) 시인이 1965년 쓴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80년대 대학 시절 접했을 때 그 고궁이 혹시 덕수궁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김수영이 그렇게 밝힌 것도 아닌데 한번 머릿속으로 들어간 생각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덕수궁을 지날 때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시를 종종 떠올린다. 지난주 철학자 강신주 박사가 펴낸 『김수영을 위하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덕수궁 부근에 갈 땐 조금 도는 코스일지라도 돌담길 따라 펼쳐지는 정동 일대를 둘러보곤 한다. 개화기 조선이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며 새로이 발돋움하려 했던 근대사의 기억이 곳곳에 스며 있다. 미국·영국·이탈리아·러시아 등 조선과 수교를 맺은 각국 공사관이 잇따라 들어섰다.

 110년 전 대한제국을 찾은 외교관 가운데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세티(1876~1948)가 있었다. 26세의 현역 해군 중위로 부임한 로세티의 인류학적 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1902~1903년 근무하며 그가 찍거나 수집한 서울의 풍광과 희귀 자료 전시회가 지금 정동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로세티가 남긴 사진에는 110년 전 서울이 보인다. 동대문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기와집촌도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초가집이 많다. 논밭으로 둘러싸인 초가집, 사람들 옷차림과 먹거리를 오늘과 비교하면 100년 새 서울은 천지개벽했다. 그가 직접 그린 한반도 지하자원 분포 지도도 눈길을 끈다.

 로세티 재임 시절 대한제국 황제는 고종이었다. 러일전쟁(1904년 2월) 발발 직전인 1903년 11월 고종 황제가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비밀 친서의 원본이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탈리아 외교부 산하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이 친서는 새삼 오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친서에서 고종은 “국외의 문제에 대해서 중립을 보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종이 이 친서에 서명했던 장소는 덕수궁으로 추정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줄곧 덕수궁에 머물렀다. 친서에서 고종은 당시 만주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인다는 소문 때문에 동양의 형세가 불온하다는 점을 먼저 상기시키면서, 그 전쟁이 대한제국 경내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국력이 모자라 위협을 예방하지 못한다며 중립을 표방하는 대목에선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고종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석 달 후 러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고, 일본이 승리한 1905년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다.

 고종은 이 같은 친서를 이탈리아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보냈지만, 열강의 이해에 따라 한반도 정책이 흔들렸던 제국주의 시대, 고종의 중립 선언을 지지한 나라는 없었다. 오늘 다시 고궁을 나오면서 국력의 미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의 처절함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