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 빠져나가는 일본, 한국도 닮아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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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호 29면

일본에서 두뇌 유출 문제가 제기된 건 20여 년 전이다. 삼성전자·LG전자 같은 한국 기업이 일본 전자업체에서 반도체와 백색가전 분야의 기술자를 영입하던 시기다. 일본인 두뇌 덕에 한국 기업은 세계 톱 메이커로 성장했고, 일본 기업은 그런 한국 기업에 밀려 추락했다는 것이 일본의 시각이다.

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최근 일본에서 다시 두뇌 유출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옛 소련 붕괴 후 과학두뇌가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난 현상처럼 최근 몇 년간 일본에서 엇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거액 적자에 허덕이는 일본 기업들은 대대적 사업 축소와 감원을 계속해 왔다. 예컨대 소니는 2008년 가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1만6000명을 감원했고, 올해 다시 1만 명을 줄일 계획이다. 파나소닉과 산요전기는 지난 2년간 3만 명 이상 줄였다. 개발환경과 처우도 나빠지고 있다. 우수한 기술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는 환경이다.

한국 기업은 리튬이온전지, 태양광발전, 에어컨인버터 기술 등 일본 기업이 앞서가는 분야의 기술자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하고 있다고 일본 현지 언론들은 보도한다. 이사급 대우를 받는 이들에겐 연봉 6000만~1억 엔, 계약기간 3~5년, 연봉과 별도의 계약금, 비서와 운전기사, 차량, 100㎡(30평) 이상의 아파트, 일본 방문 비용 등이 제공된다고 한다.

일본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는 건 중국 기업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르다면 대상이 주로 일본 기업이 경쟁력을 잃어 일본 안에서 일자리를 찾기 힘든 기술자, 첨단 분야와 관련 없는 기술자라는 거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기술자들은 대체로 욕을 먹지 않는다. 한국으로 가는 일본 첨단기술자가 “경쟁국에 기술을 파는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것과 대비된다.

영입 제안에 쉽게 응하는 일본 기술자는 대개 반(半)강제로 직장을 떠나야 하거나 벌어놓은 것은 적고 연금을 받으려면 더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외국 기업으로 옮기는 것에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금전적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정년 이후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다거나 일본 기업과 달리 추진력이 강한 기업에 근무하고 싶다는 이가 의외로 많다. 1970~8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끈 세대라면 소매치기나 도둑, 바가지 요금이 판치는 개도국의 사회환경조차 감내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어수선한 일본에서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다.

남 얘기 할 때가 아니다. 머릿수 많은 베이비붐 세대가 우리나라에서도 은퇴를 시작했다. 국민연금을 받자면 몇 년 기다려야 하는 이들이다. 임시방편 구조조정에 밀려나는 첨단기술자도 적지 않다. 외국 기업이 이들에게 접근한다면 그저 솔깃하기만 할까. 이미 중국 기업 등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한국인 기술자들도 적지 않다. 어찌 보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게 기술이다. 일본도, 한국도 그런 흐름을 좇아 기술을 습득했다. 중요한 건 우리 울타리다. 두뇌 유출의 원인이라는 게 좀체 풀기 힘든 노령화 대책 등 우리 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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