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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저질을 내려치는 철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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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4·11 총선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선 저질·거짓·막말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나꼼수다. 다운로드(download)가 많고 집회마다 수천 명이 모이자 신이 나서 욕설의 춤을 췄다. 손으로 청와대를 가리키며 “저 XX들”이라고 했다. ‘조·중·동 씹XX’는 아예 입에 붙었다. 나꼼수가 춤추자 일부 정치세력도 덩달아 춤을 췄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떤 이는 나꼼수를 지역구로 불러 선거에 이용했다.

 투표 이틀 전 나는 표가 중요하다고 썼다. 민주국가에선 총과 펜과 혀보다 표가 강하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던 유권자는 드디어 표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이슈는 ‘김용민 막말’이었다. 이번에 19곳에서 2000표 내로 승부가 갈렸는데 11곳이 새누리당 승리였다. 김용민이 없었다면 최소한 이 11곳은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새누리 141석, 야권연합 151석이다. 유권자는 김용민을 단죄하면서 여소야대를 거두어들였다. 평시엔 저질을 내버려두었다가 결단의 순간에 철퇴를 내린 것이다.

 저질·막말 세력에 일고(一考)의 가치가 없는 건 그들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막말이 드러나자 김용민과 김구라는 ‘옛날’ 핑계를 댔다. 이름 없던 시절의 일이니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덮어만 주면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거였다. 없던 일로 해주면 여전히 ‘돈 많이 버는 연예인’으로 남겠다는 거였다. 차라리 “옛날도 지금도 소신”이라고 버텼다면 나는 그들을 다시 봤을 것이다.

 10년 전 ‘구봉숙 트리오(김구라·황봉알·노숙자)’는 인터넷에서 ‘한국을 조진 100人의 개XX’라는 노래를 불렀다. 홍대 앞에서 부르기도 했다. ‘한국을 빛낸 위인 100명’의 가사를 바꾼 것이다. 노래는 역대 대통령, 유명 연예인을 욕설로 난도질했다. 대한민국은 ‘부패순위 1순위 X같은 나라’란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백인이다. 트리오는 이를 가리켜 건국 대통령을 “백마 타고 달려온 꼰대”로 묘사했다. 유신독재 18년은 “X팔년”으로 둔갑했다. ‘보통사람 노태우’는 남자성기에 빗대 ‘보통XX 노태우’가 됐다. ‘X대가리 김영삼’은 차라리 점잖다.

 어떤 여배우는 깜XX를 낳았고, 어떤 여배우는 ‘XX떼고 X됐다’고 그들은 조롱했다. 성(姓)을 그대로 적어 사람들이 소문을 연상하도록 했다. 트리오는 섹스 비디오로 시련을 겪은 여성들도 공격했다. ‘비디오로 X되고 한국은 X된다’고 했다. 노래에 등장한 여성들은 괴소문과 범죄의 처절한 피해자다. 남성이라면 여성을 보호하고, 연예 스타가 되려면 선배를 감싸야 하거늘, 트리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패륜을 서슴지 않았다.

 김구라는 ‘철없던 과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래를 부른 2002년 그는 이미 32세였다. 그가 조롱한 이승만 박사는 32세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꿈을 키웠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국을 보면서 미국 YMCA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란 연설을 했다. 문장이 아름답고 고상해 워싱턴포스트가 실을 정도였다. 이승만 박사는 혀로 나라를 떠받쳤다. 똑같은 32세에 김구라는 혀를 돈 밑에 두었다.

 저질·막말이라는 독과(毒果)는 그냥 열리지 않는다. 뿌리와 토양이 있다. 아무리 저질이어도 주류·기득권을 공격하기만 하면 일부 세력은 이를 덮거나 미화한다. 나꼼수가 대표적인 경우다. 저질과 편향, 허위를 질타하기는커녕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은 박수를 쳤다. ‘풍자의 미학’이라고 치켜세웠다. 현혹되는 우중(愚衆)을 계몽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에 이용했다. 그것이 김용민 파동이요 문재인의 ‘부산 지역구 나꼼수’ 사건이다.

 위대한 혀는 레이건처럼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 그러나 저질의 혀는 역사를 왜곡하고 우민(愚民)을 선동한다. 4·11 총선은 그런 저질을 철퇴로 내리쳤다. 막말의 질주를 막고 사회의 기강을 세웠다. 얼마나 섬뜩한 선택인가. 김용민·김구라… 다음엔 누가 철퇴를 기다리나.